"같이 갑시다!"와 동맹 모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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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갑시다!"와 동맹 모독
법적으로 누가 차기 미합중국의 대통령이 될 것인지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세상이 난리다. 특별히 청와대 직원이 작성한 "같이 갑시다!"라는 트위터 게시물을 보면 우선 감탄이 나온다. 대담하다! 멋지다!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행동력에서 만큼은 혁명가들에게 배울 점이 많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것(트윗)은 동맹 모독이다. 신앙의 자유(양도할 수 없는 천부인권), 자유민주주주의, 자유시장경제, 강한 국방을 통한 평화 도모(반공을 기치로) 등의 '가치동맹'이 결여된 '이념동맹'은 진정한 의미의 한미 동맹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을 ‘치유’하고 ‘통합’하겠다는 바이든과 언제나 ‘사람이 먼저’라는 문재인은 마치 "세계인들이여 이제 일어나 소울(soul)의 나라로 같이 가자. 억압과 차별이 없는 그 나라에서 우리는 비로소 주체가 될거야!"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분명히 이 땅 위에 인간의 힘으로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노력은 역사적으로 실패를 거듭해 왔다. (고)한경직 목사의 가르침 및 조평세 박사의 칼럼은 모두 인간 상위의 존재를 겸허히 인정한 미국의 독립선언(1776년)과 인간이 유토피아를 설계할 수 있다는 인간 이성의 지나친 신뢰를 바탕으로 한 프랑스혁명(1789년)을 대비해서 자유의 의미를 설명했다. 전자인 1776의 자유는 신의 형상을 닮은 각 개인이 동등히 누리는 “천부인권을 인정하는 보수주의적 자유”인 반면, 후자인 1789의 자유는 “인간 스스로 유토피아를 설계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중심의 자유’”를 말한다고 한다. ([조평세 칼럼] “1776의 자유와 1789의 자유”, 펜앤드마이크, https://www.pennmike.com/news/articleView.html?idxno=20335)
한경직 목사는 18세기에 인민주권으로 공화국을 세운 나라들로 미국과 프랑스를 대비하여 각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같은 인민주권이지만 불란서는 무신론적 인민주권이었으므로 테러의 성행, 반 혁명운동의 봉기, 나폴레옹 제국의 건설, 왕정의 복구, 나폴레옹 3세의 제국 재건 등으로 19세기 중 가장 고난당한 민족이었습니다. 그간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청년의 수가 얼마였습니까? 반면에 미국은 기독교적 민주주의에 의한 국가로서...... (중략). 미국은 건국 이래 오늘날까지 세계에서 제일 축복 받은 평화의 나라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주권의 근본은 다 하나님에게 있다는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13:1).” (“기독교와 정치”, 한경직 묵상 365, 나눔사, 292쪽)
그러므로 일면 먹음직하고 보암직한 소울(soul)의 나라로 인도하려는 이 '선전문구'(트윗)를 보통 시민인 각 개인이 엄정히 걸러내야 한다. 세상을 보는 프레임에 따라 상이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청와대 직원이 작성한 “같이 갑시다!”는 (1) 가치 동맹으로써의 한-미 동맹에 대한 모독이며, (2) 인민민주주의를 배격하는 자유 국민에 대한 모욕이다. 그것은 대한민국을 이끄는 리더십 그룹이 가진 ‘가치’와 ‘동맹’이라는 단어에 대한 인식의 한계를 자기 소개 형식으로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귀중한 사례학습의 자료로 남겠지만, 시기적으로 성급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미국의 차기 대통령이 누구인지는 아직 법적으로 결정되지 않았다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보통의 개인을 둘러싼 매서워 보이는 정치-미디어-문화예술-교육-비즈니스 환경이 시간이 갈수록 저항하는 자를 향해 “네가 어떻게 감히(How dare you) 민주적 선거결과를 부정하는가”라고 경고하게 될지도 모른다. 또는 자의적 정의와 인권의 나라로 향하는 ‘포스트모던 쾌속열차’는 이미 대세기 때문에 하루 빨리 동승할 것을 암묵적으로 유도해 갈 수도 있다. 그러나 미국의 젊은 보수주의자들이라면 이럴 때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아니요, 진실은 당신의 감정을 상관하지 않습니다(No, facts don’t care about your feeling).” 그러므로 부드러운 감정과 분위기 보다 투박하더라도 진실이 중요한 사람은 지금 먼저 기다림을 택할 것이다. 아직 두 눈을 뜬 채로 차가운 이성을 가지고 기다릴 것이다.
또 어쩌면 “아니, 국내외의 거의 모든 언론사와 빅테크 기업(페이스 북, 트위터 등)이 바이든이라는대 왜 자꾸 트럼프를 고집하냐”는 압력이 자유로운 개인을 둘러쌀 수도 있다. 이럴 때 한 번더 호흡을 가다듬고 다음과 같이 중심을 지켜야 한다. “선거의 투명성은 민주주의의 생명입니다. 우편투표를 포함해서 보통 사람의 기준으로 볼 때 선거의 투명성 흠결에 대한 합리적 의심이 존재했습니다. 법적으로 유효한 당락을 결정짓기 전에 관련된 소송이 이뤄질 것이며, 아직 최종적으로 확정된 승자는 없습니다.”
현실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미국-중국 간의 다차원적 분쟁구도 속에서 간간이 겉으로만 “한미동맹, 우리 사이 문제 없습니다”라는 제스쳐를 취할 뿐 반복해서 중국의 줄에 서려는 한국의 스탠스는 지난 4년간 입증 되었다. 따라서 높은 산봉우리라는 칭호를 붙여가며 중국과 같은 꿈(chinese dream)을 꾸고자 하는 문재인과 '중국의 치어리더'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 바이든 간의 연대는 인권 및 통합을 중시한다는 달콤한 선동과 달리 반인도주의적, 반기독교, 반자유, 및 반생명적 열매를 야기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참 문제인 문재인 계정 트윗은 문재인과 해당 계정의 실관리자가 단순히 바이든-해리스에게 보낸 메세지로만 볼 수 없다. 그것은 특정 집단의 정체성 선전 및 여론 선점의 효과도 가진다. 과연 미국 내 반미국(미국 건국정신의 가치를 부정) 세력과 한국 내 반대한민국(자유민주헌법, 건국 및 산업화의 가치를 부정) 세력이 ‘같이’가는 동맹은 어떤 동맹일까? 혹자에겐 낭만일 수 있지만, 관념적 ‘사람 중심의 세계관’이 아닌 인간 개개인의 존엄함을 추구하고 보전하려는 사람에게 그 연대는 파괴의 전조(前兆)로 다가온다.
얼마전 미국의 젊은 보수주의 논객 마이클 J. 놀즈 (Michael J. Knowles)는 이번 미국 대선을 앞두고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만약 그들(좌익)이 패배한다면 우리는 나라를 보전(preserve)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들이 승리한다면? 하나님 우리를 도우소서.” (“GOD HELP US ALL: There is more at stake in 2020 than you think”, Young America's Foundation, https://youtu.be/LqF4MFKTk1M)
이제 지속가능한 대한민국과 굳건한 한-미 동맹 유지강화를 위해 보통의 자유 시민의 일원으로서 몇 가지 행동을 실천해야겠다. 먼저는 “하나님 우리를 도우소서”라는 기도를 올리는 것이다. 다음은 바이든-문재인의 ‘같이 동맹’을 정중히 거절하는 것이다. 또한 진정한 ‘가치 동맹’이 지속되도록 부단히 공부하는 가운대, 끝 없이 대중을 속이는 간교한 여론의 호수를 우아하게 팔로 저어 나가는 듯이 무던히 헤쳐 나가야겠다.
그러나 겉으로만 여유 있는척 하는 것일뿐 실재 물 밑에서 일어나는 자유 시민의 발바닥 무브먼트는 굳이 상상하지 말자. 막상 서로 살펴보면 부끄러울 수 있다. 아마 죽.을.듯.이. 움직이고 있을 듯! 그래야 세태에 눌려 익사하지 않으면서도 수면 위에서 한 조각 품위를 유지할 수 있다!
비록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주장하는 인권과 평화의 신을 자처하는 오색-혼들은(souls) 우리 편이 아니지만, 믿는 이에게 참 자유를 선사할 힘을 가진 신의 영(the Spirit)은 진정 부르짖고 찾는 자의 편에 서 주실 것을 믿는다.
그나저나 바이든이 되었으니 관련 주식이 좋아질거라 기뻐할 친구가 생각나 한번 더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오 하나님, 우리를 도우소서! 당신과 같이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