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덴티티 정치학과 선거 By Joshua Mitch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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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ew Paradigm편집자]
이번 미국 선거에 관련해서는 그 의미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으로 나뉘는 것같습니다. 아는 사람 중에 조슈아 미첼 조지타운 교수같은 인물이 존재한다는 것이 이미 미국의 위대성이 아닌가 합니다. 트럼프-펜스-폼페이오 트로이카의 중요성은 현재 미국이 봉착해 있는 가치 위기가 미국의 약점을 집요하게 공격하여 결국 건국정신을 파괴하는 악의 세력임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는 정치인들이라는 점입니다. 미첼 교수가 “정체성의 정치”라고 한 말의 의미를 정확히 알 뿐 아니라 이미 천부인권위원회와 1776위원회를 통해 실천적 해결책을 내놓고 있습니다. 한국에도 동일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지만 이를 간파하고 명료하게 설명하는 학자와 정치인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미국과 다른 점입니다. 다만 한국에는 위대한 시민들이 있습니다. 이 어두운 시절을 깨어있는 소수라도 반드시 끝까지 버티면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IDENTITY POLITICS AND THE ELECTION
아이덴티티 정치학과 선거
By Joshua Mitchell
* Joshua Mitchell is a professor at Georgetown University, and the author of American Awakening: Identity Politics and Other Afflictions of Our Time, which will be published on November 17.
조슈아 미첼은 조지타운 대학교 교수이자, 올해 11월 17일 출간 예정인 <미국의 대각성 운동: 아이덴티티 정치학과 우리 시대의 고통들 American Awakening: Identity Politics and Other Afflictions of Our Time>의 저자이다.
November 06, 2020 / The First Things
Nothing has been settled. As of this morning, votes are still being tabulated and the results of the November 3 election remain indeterminate. It looks like Joe Biden may have won. Yet no one knows when, or if, there will be an uncontested winner.
그 어떤 결과도 나오지 않았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개표 결과는 현황판에서 수시로 바뀌는 수치로만 나왔을 뿐이고, 11월 3일에 치른 선거 결과는 확정되지 않았다. 조 바이든이 승리를 거둘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누구도, 언제, 어떤 식으로 이견의 여지없는 승자가 정해질지 알 수 없는 상태다.
Beyond the election itself, the question of the future of the American regime remains unsettled. No presidential election will be able to resolve the issue, however, because our problem is deeper than politics—deeper even than culture.
선거 그 자체를 떠나서, 미국이라는 체제의 미래가 어떨 것인가 하는 질문이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대통령 선거 결과가 어떻게 나오더라도 이 문제는 해결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야말로 정치 그 이상, 더욱이 문화 그 이상의 더욱 깊은 문제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Many of us who grew up in the 1960s and who outgrew its madness have watched the left become increasingly virulent with each passing decade. We recall with trepidation Marxism’s promise of an unalienated, Edenic world without scarcity, in part because the collapse of Marxism after 1989 did not end the leftist dream of destroying America’s liberal institutions. The longing to destroy the existing state of things runs deep on the left.
1960년대에 성장기를 보내며 그 시대의 광기를 몸소 체험한 많은 이들은 좌파 세력이 뿜어내는 독이 수십년 세월을 거치며 얼마나 지독해졌나 지켜보았다. 우리는 마르크시즘이 약속한, 풍요롭고도 모두가 하나된(unalienable) 에덴 동산의 세계가 무엇인지 무서울 정도로 또렷하게 알고 있다. 1989년 마르크시즘이 몰락했다 해도, 그것이 곧 미국의 자유로운 체제를 파괴하고자 하는 좌파들의 꿈도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세계의 현존 질서를 파괴하고자 하는 열망은 좌파 내부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Postmodern thought, which emerged in the aftermath of Marxism’s collapse, had its origins in Nietzsche’s thought, and seemed to be something entirely new, perhaps even a welcome break from Marx’s ferocious certainty; yet it turned out to be even more hostile than Marxism was. Postmodern thought rejected the idea that history has a meaning, that lurking within our flawed and broken world is a promise yet to be fulfilled. It undermined liberal America not by offering an alternative meaning of history, but by declaring that there was none to be found. Its goal was not purity and unification, but the destruction of the longing for these naïve fictions. Although its aim was different than that of Marxism, postmodernism was no less ferocious in attacking America’s increasingly fragile institutions and self-understanding.
마르크시즘의 몰락 이후에 고개를 들기 시작한 포스트모던 사상은 그 사상적 원류를 니체(Nietzshe)에 두고 있는데, 다른 한편 이는 마르크스의 저 광포한 확신에서부터 나온 완전히 새롭고도 단절적인(a welcome break) 사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내 이 사상은 마르크시즘 그 자체보다도 더욱 더 위험천만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포스트모던은, 인간의 역사에는 어떤 의미가 있으며, 비록 흠결도 많고 파편화된 것 같은 세계라 할지라도 그것은 앞으로 우리가 채워가야 할 하나의 약속이라는 관점을 거부한다. 그렇다고 해서 자유 세계인 미국에 대안적인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국 역사에서는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다고 선언하며 미국의 역사와 그 의의를 깎아내린다. 이 순수하지도 않고 조화롭지도 않은 역사관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적은, 미국의 이상이라는 그 순진한 관점과 바람을 해체시켜 버리려는 데 있다. 겉으로는 마르크시즘의 목적과 차이가 있다고 해도, 포스트모던이란 결국 점점 나약해져 가고 있는 미국의 제도와 자기 인식을 파고들어 이를 잠식하려는 포악한 의도에 지나지 않는다.
Postmodernism still lingers in the corridors of academia, but the great threat now facing America is identity politics, the third leftist wave since the 1960s. Identity politics, unlike postmodernism, does propose that history has a meaning. That meaning can be stated in a simple phrase, which is the cornerstone of the current Democratic party: “the purpose of politics is to redeem the innocent victims, and to scapegoat those who were their transgressors.” Hence #MeToo, and BLM, and Save The Planet, and a host of other hysterical cries to redeem the world from stain, but which always seem to give us, instead, an ever-expanding state apparatus that wants to control the innocents by “protecting” them and to cure the deplorables of their irredeemable ideas—or scapegoat and purge them if they do not recant. History marches in the direction of protecting the pure and cancelling the impure. That is identity politics.
포스트모던 사상이 제도권 학문 세계에서 오랜 시간 자리를 지키고 있기는 하지만, 바로 지금 미국에서 이 사상이 지닌 가장 큰 위험성은 1960년대부터 일기 시작한 제3차 좌파 이념의 물결인 아이덴티티 정치학(identity politics)에 있다. 기존 포스트모던 사상과는 달리, 아이덴티티 정치학은 역사에는 어떤 의미가 있다고 강하게(does) 내세운다. 그 의미란 아주 단순한 구절로 표현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현재 민주당의 이념적 토대를 이루고 있다. “정치의 목적은 저 순수한 희생자들을 구원하고, 그 희생자들에게 죄 지은 자들을 제물로 바치면서 이룰 수 있다.” 그리하여 #MeToo, BLM(Black Lives Matter)과 Save The Planet 운동, 그 밖에 이 더러운 세상을 구원하자는 히스테리컬한 외침을 주동하는 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무고한 이들을 “보호”라는 명분으로 조종하고, 이들이 도저히 고칠 수 없는 병든 사상을 가졌기 때문에 이를 치유해주겠다는 명목으로 다가가서는, — 반대로 이 잘못된 사상을 폐기하지 않겠다고 하는 이들은 희생양으로 삼거나 내쫓아 버리는 식으로 — 결국 이들을 통제할 수 있는 국가적 장치를 끝없이 확장시키겠다는 야욕을 드러낸 셈이 되었다. 역사는 순수한 자들을 보호하고 불순한 자들은 처단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아이덴티티 정치학이다.
Marxism could never take hold in America because Americans believed in private property. Because property is the cornerstone of our republic, and cannot be removed, Marxism failed. Postmodernism could never really take hold in America because Americans believe that history has a meaning—and even that America has a special place in history. The reason identity politics has taken hold is because Americans suffer deep and abiding guilt, from two main sources: Christianity itself, and the legacy of slavery in this country. What the left could not do through Marxism or postmodernism, it now is doing through identity politics—namely, undermining every institution and every venerable historical memory in America.
미국은 사유 재산을 보장하는 나라이므로, 미국에서 마르크시즘은 결코 자리잡을 수 없었다. 사유 재산이란 우리 체제의 주춧돌이자 결코 제거할 수 없는 기본 토대이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 역시 사실상 미국에서 자리를 잡은 적이 없다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미국이라는 체제에서는 역사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특히 미국은 세계와 인류의 역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아이덴티티 정치학이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데에는, 미국이 참으로 뿌리 깊은 원죄로 고통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 죄의 원천은 두 가지, 즉 기독교적 영성(Christianity) 그 자체와 노예제도의 역사이다. 좌파들이 그간 마르크시즘이나 포스트모던으로는 할 수 없었던 일을, 이제는 아이덴티티 정치학을 통해 이루어내고 있다. 말하자면 미국의 모든 제도와 취약한 역사적 기억을 파고들어 좀먹게 하는 것 말이다.
Many readers of First Things, myself included, voted for Donald Trump in 2020—with varying degrees of internal doubt about his character and fitness for the presidency. We did so because we have watched identity politics scapegoat anyone who opposed it, and because we see it as the greatest threat yet to the future of our country, precisely because it uses guilt to destroy America. Arguments do not matter to identity politics; all that matters is whether you have a right to speak—which is to say, whether you are a member of an identity group of “innocent victims.” Donald Trump did not have a right to speak. He spoke anyway. Boldly. Often badly. He was a white heterosexual male who never felt guilty. How could he? His religion was the one formed by Norman Vincent Peale’s 1952 classic, The Power of Positive Thinking. Success, not guilt, organized his world. Identity politics guilt was for losers. He was unmoved by guilt—and was hated by the left because he was unmoved.
필자를 포함해 우리 <First Things>의 많은 애독자들은 이번 2020년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에게 표를 던졌다. 비록 그의 성격이라든가, 그가 과연 대통령직에 적합한지에 대해서는 각자 마음 속에 품은 의심이 다 다를지라도 말이다. 우리가 트럼프에게 표를 던진 이유는 바로, 아이덴티티 정치학이 자기들에게 반대하는 그 누구라도 전부 다 제물로 삼는 것을 계속 보아왔기 때문이다. 아이덴티티 정치학이야말로 우리나라의 미래에 있어 가장 큰 위협이기 때문이며,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이덴티티 정치학이 죄의식을 이용해 미국을 파괴하려고 들기 때문이다. 아이덴티티 정치학은 반론을 허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누가 발언할 권리가 있느냐, 즉 “순수한 희생자” 집단에 속한 아이덴티티를 가진 이가 누구냐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는 이런 점에서 발언의 권리를 가지지 못한다. 그런데도 그는 발언했다. 아주 대놓고 말이다. 말을 곱게 한 적도 별로 없다. 말하자면 그는 한 번도 죄의식을 느껴본 적 없는 백인 이성애자 남성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1952년에 나온 고전, <적극적 사고의 힘(The Power of Positive Thinking)>의 저자 노먼 빈센트 필 목사의 영향을 받아 그의 신념(religion)이 형성되었다. 성공을 향해 전진하고, 죄의식은 가지지 말 것이며,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라는 것이 노먼 필의 주장이다. 반면 아이덴티티 정치학의 죄의식은 인생의 실패자들을 위한 것이다. 트럼프는 죄의식으로 삶을 살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그 점 때문에, 아무리 그를 죄의식으로 밀어붙여도 꿈쩍하지 않기 때문에 좌파들에게 미움을 받는 것이다.
Donald Trump was someone who, literally, could not exist in the world identity politics constructs. That is why the left needed “Russian collusion” to explain his election in 2016. Russian collusion was the deus ex machina that made it possible for Trump to infiltrate their world. The left had to destroy Trump if identity politics was to continue its reign of perverted righteousness. Many of us saw that clearly. That is why we voted for him. We wanted to contribute to the end of its reign.
도널드 트럼프는 아이덴티티 정치학이 구축한 세계에서는, 문자 그대로 존재해서는 안 되는 인간이다. 이게 바로 2016년 트럼프가 당선된 이유를 설명할 때 좌파들이 “러시아 공모설(Russian collusion)”을 들이대는 이유다. 러시아 공모설은 트럼프가 좌파들이 구축한 세계에 알아서 걸려들게 만든 억지춘향식 장치(deus ex machina)다. 좌파들이 자신들만의 비틀린 공의(righteousness)를 내세워 계속 득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트럼프를 망가뜨려야만 했다. 우리 중에 많은 이들이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았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트럼프에게 표를 준 까닭이다. 그들의 득세가 끝을 맺도록 우리의 힘을 보태고 싶었기 때문이다.
Whether he loses or wins the election, Donald Trump and others like him who are strangely immune to the scapegoating efforts of the left will not be enough to end the identity politics reign of righteousness. The task is deeper than politics, deeper than what our presidents can say or do. Deeper even than culture. The task—dare I say it—is religious. Identity politics is a profound deformation of Christianity, a ghastly and crippled derivative that seeks the redemption of the world through the scapegoating of one group by another. For the moment, it has in its sights heterosexual white males. It will not stop there. White women will be next; followed, I suggest, by “heteronormative” black men. Like all revolutionary movements, it will eventually come for its early proponents, in a final reign of terror.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번 선거에서 이기든 지든, 좌파들이 그토록 자기들의 제물로 삼고 싶어 안달하는 데 어지간히 이력이 난 트럼프 대통령 및 그와 뜻을 같이하는 모든 이들은, 아이덴티티 정치학이 공의로움을 내세워 득세하는 이 상황을 끝내는 데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임무는 정치학보다도 더욱 더 엄중하고, 우리의 대통령이 목소리를 높이고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보다도 더 치열하다. 이는 문화의 차원조차도 뛰어넘는다. 필자가 감히 말하건대, 우리의 임무는 종교적이다. 아이덴티티 정치학은 기독교적 영성을 근간에서부터 해체하고 있으며, 하나의 집단이 다른 집단을 제물로 삼도록 이간질하면서 이 세계를 구원하겠다고 나서는, 너무나도 섬뜩하고 일그러진 탈선적 세계다. 지금 당장 그들의 시야에 잡힌 대상이 이성애자 백인 남성일 뿐이다. 이들의 시도는 여기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백인 여성이 그 다음이 될 것이고, 필자가 보기에는 그 다음은 “이성애적 규범을 따르는” 흑인 남성이 될 것이다. 다른 모든 혁명 운동이 그러하듯, 처음에는 자기들을 지지하고 따르는 이들을 내세우다가, 결국에는 공포 통치로 변하게 되리라.
How does the current terror end? The identity politics reign of righteousness will end when we return to the orthodox Christian understanding that only the divine scapegoat, Christ, can take away the sins of the world. That insight once transformed the world. It can do so again.
어떻게 하면 지금의 이 공포 상황을 끝낼 수 있을까? 아이덴티티 정치학의 공의를 내세운 통치는, 우리가 오직 그리스도만이 이 세상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주님 앞에 스스로를 바친 희생 제물이라는 기독교 교리의 핵심에 대한 통찰력을 회복할 때에야 비로소 끝날 것이다. 바로 이런 통찰이 이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 다시 이 통찰을 회복할 때다.
i. 역자 주: Norman Vincent Peale, 1898~1993. 미국 오하이오 태생의 목사이자 작가이며, 최전성기 때 발행부수만 1,600만 부가 넘는 것으로 알려진 <가이드포스트(Guiedposts)>지 창간인이기도 하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생을 바라볼 수 있도록 자신에게 동기 부여하는 것이 중요함을 역설하며 전 세계인에게 사랑을 받았고, 자기계발 또는 긍정심리학 분야의 문을 열었다고 평가받는다. ‘만인의 목회자’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번역 : The New Paradigm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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