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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대선에 내포된 이념적 함의 / 이강호, 월간조선 기고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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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에 대한 과신(過信)은 이성적이지 않다. 데이비드 흄(David Hume·1711~1776)은 “이성은 감정의 노예”라고까지 했다.
한국에서도 ‘트빠(트럼프빠)’ 현상이 나타난 것은 가치관의 좌익적 폭주(暴走)현상에 대한 격렬한 반감(反感)의 표출이 더 핵심이었다. 이것은 결코 빗나간 감정적 투사(投射)가 아니다.
⊙ 美 사회 저변의 균열과 대립은 트럼프가 만든 게 아니라 누적된 피로현상의 소산
⊙ 백인 중산층, BLM운동 등의 영향으로 전통적 가치와 미국의 국가적 존엄이 우습게 취급되는 상황에 반감 여전
⊙ 한국의 ‘트빠 현상’은 가치관의 좌익적 폭주 현상에 대한 격렬한 反感의 표출
어떤 결과든 그것은 원인(原因)에 의한 것이며, 원인은 결과에 앞서 이미 존재한다. 그래서 논리적으로만 보면 원인을 파악하면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게 된다. 그러나 예측과 결과는 별개의 문제다. 결과를 낳는 원인을 온전히 파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모든 원인을 포착할 수 없으며 포착한 원인을 정확하게 헤아리는 데도 한계가 있기 마련인 것이다.
심오한 원리도 아니다. 따지고 보면 평범한 상식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관심이 가는 어떤 일이 있으면 예측을 해보곤 한다. 그 한계를 몰라서가 아니다. 선호(選好)와 기대(期待)가 있기 때문이다. 관심을 갖는 것부터가 그렇다. 아무런 선호와 기대도 없다면 애초에 관심도 갖지 않게 된다. 그래서 예측은 기대와 뒤섞이기 일쑤다.
물론 선호와 기대와는 별도로 결과에 대한 예측에선 냉정과 객관을 유지하려는 이들도 당연히 있다. 그러나 그래도 오류(誤謬)의 가능성은 여전히 있게 된다. 모든 변수(變數)를 파악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냉정과 객관도 자기 합리화를 위한 경우가 드물지 않다. 스스로 의식하든 못 하든 그렇다.
이성(理性)이 없어서가 아니다. 하지만 이성에 대한 과신(過信)은 이성적이지 않다. 데이비드 흄(David Hume·1711~1776)은 “이성은 감정의 노예”라고까지 했다. 이성은 종종 주관적 원망(願望) 아래 놓인다. 정치적 사안인 경우는 특히 더 그러하다. 이번 미국 대선(大選)의 경우는 어떨까?
선거 예측이 적중은 했지만…
이번 미국 대선의 결과는 미국의 주류(主流) 언론과 여론조사 기관들이 예측한 바대로 바이든의 승리로 나오고 있다. 예측이 적중한 셈이긴 하다. 하지만 이것은 표면이다. 예측이 적중한 듯 보이기는 하지만 진통(陣痛)이 만만치 않다. 트럼프가 부정선거 시비를 제기하며 승복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 그런 사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00년 부시와 고어가 맞붙었던 선거 때도 그런 일이 있기는 했다. 트럼프가 쉬이 승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이미 있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의 양상은 예측된 바를 좀 많이 벗어나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트럼프의 득표력이 만만치 않음이 드러났다. 그리고 경합주(競合州)들에서의 시비도 만만치 않다.
트럼프라는 사람 개인의 인간성 문제라고 하면 결론은 간단하다. 그런데 공화당이 함께 대응을 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트럼프와 공화당의 태도에 대한 옳고 그름의 시비(是非)를 떠나 이제는 공식적인 정치적 사안일 수밖에 없다. 단시간 내에 원만하게 마무리될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예상 밖의 상황이다.
사실 따지자면 미국 주류 언론 등의 예측부터가 주관적 원망을 품고 있기도 했다. 그들도 그 점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정치적 진통이 만만찮게 이어질 것이라 예측하지는 못한 듯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러지 않길 바랐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이 진통은 쉬이 마무리될 것 같지 않다. 그러기 힘든 정치적 상황이 있기 때문이다.
아직 대선은 안 끝났다?
트럼프는 부정선거 시비를 제기하며 핵심 경합주 등에 대해 소송전(訴訟戰)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 소송은 주(州)법원에서는 일단 패소(敗訴)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2~3심으로 이어가는 것은 물론 연방대법원에 상고(上告)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노림수가 있다는 분석이 있다. 핵심 경합주의 당선인 확정을 저지하는 전략이라는 것이다.
미국 대선은 전 국민 투표 후 주별로 선출된 선거인단이 그 주에서 승리한 후보에 최종 투표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 절차가 순조롭게 진행되려면 주정부가 법적으로 11월 20일까지 선거 결과를 확정 지어야 한다. 12월 8일까지 각 주가 선거인단을 확보해야 하며 12월 14일 538명의 선거인단이 모여서 270명 이상을 받는 사람을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내년 1월 6일 의회에서 승인해야 한다.
그런데 소송이 진행되는 경합주는 결과를 확정지을 수 없게 될 수 있다. 만약 주 당국이 공식 승자(勝者)를 발표하지 못하거나 확정 시한을 넘기게 되면 헌법에 따라 선거인단 임명권은 주의회로 넘어가게 된다. 현재까지 트럼프 캠프는 펜실베이니아주, 미시간주, 애리조나주에서 선거 결과 확정을 막아달라는 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모두 주의회에서 공화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곳이다. 즉 만약 법적 분쟁으로 시한을 넘겨 주의회에서 선거인단을 결정하게 되면 공화당이 이기게 될 수 있다.
물론 이런 과정을 민주당 측이 마냥 지켜볼 리는 없다. 분쟁과 다툼으로 인해 주의회에서도 선거인단을 확정 짓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면 12월 14일 최종 투표일까지 대통령 선거인단 과반(過半)을 확보한 후보가 나오지 못하게 된다. 이 경우 대통령 선출 권한은 연방하원으로 넘어간다. 연방하원은 주별 인구 비례로 총 435명으로 구성돼 있지만, 대통령 선출에는 주별 1명씩 총 50명이 투표한다. 이 가운데 26명을 확보한 후보가 이긴다.
현재 주별로 하원 다수당을 계산하면 공화당은 26명, 민주당은 22명인 것으로 추산된다. 전체 연방하원 의원 수는 민주당이 많지만 한 주에 여러 의원이 모여 있는 곳이 많아, 의원들이 분산돼 있는 공화당에 밀린다. 그래서 이 경우에도 결국 공화당의 트럼프가 최종 승리를 하게 된다.
물론 사실은 트럼프 캠프 참모들조차 이 전략의 성공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다는 얘기도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이런 시나리오를 논의하는 주목적은 트럼프 대통령을 달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분석은 아무래도 반(反)트럼프 측의 바람으로 보인다.
결국에는 공화당조차도 트럼프를 외면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들 했다. 심지어 트럼프 가족 내에서의 불화설까지 나돌기도 했다. 트럼프는 정치적으로 완전히 고립되고 버림받게 될 것이라는 전망도 이어졌다. 그런데 이 같은 예상과 달리 공화당이 트럼프를 중심으로 결속하는 움직임이 확연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에는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조지아州 상원의원 선거
이번 미국 선거는 대통령 선거만이 아니라 상원・하원 의원도 함께 선거가 치러졌다. 상원은 공화당이 우위에 있었고, 하원은 민주당이 절대 과반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민주당은 이번 상하원 선거에서 기대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하원에서는 5석을 상실했으며 상원에서도 현재로서는 과반 획득에 성공하지 못했다. 총 100석 가운데 현재까지 공화당이 50석 민주당이 48석을 확정 지었다. 남은 2석은 조지아주 상원의원이다. 그런데 조지아주의 2석은 이번 선거의 개표로 확정 지을 수 없게 되었다.
조지아주는 상원의원에 당선이 되려면 50% 이상 표를 얻도록 돼 있다. 50%를 득표하지 못한 경우에는 재경선을 해야 한다. 조지아주의 상원의원 2석은 개표율 99% 상태에서 1석은 공화 49.71%, 민주 47.96%였다. 나머지 1석은 보궐선거였는데 모두 20명의 공화·민주·무소속 후보가 난립하여 민주 32.9%, 공화 25.9%로 2석 모두 과반 획득이 나오지 않았다. 따라서 2석 모두 재경선을 해야 한다. 이 재경선은 2021년 1월 5일 치러지게 돼 있다.
만약 공화당이 조지아주 상원의원 2석을 모두 획득하면 총 52석이 되어 상원에서 과반수를 확보하게 된다. 반대로 만약 이 2석을 모두 민주당이 갖게 되면 의석은 50대 50이지만 민주당 바이든의 대통령 당선이 확정될 경우 부통령이 상원의장으로 캐스팅보트를 갖게 되기 때문에 상원도 민주당이 장악하게 된다. 민주당은 하원에서 5석을 상실했지만 여전히 과반을 확보하고 있다. 따라서 조지아주의 상원의원 재선거에서 공화당이 2석을 모두 잃게 되면 바이든의 당선이 확정될 경우 대통령·상원·하원 모두를 민주당이 장악하게 된다. 때문에 공화당은 조지아주 재경선에서 적어도 1석은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
현재의 개표 결과를 기준으로 보면 일단은 공화당이 조지아주에서 상원 1석은 우세한 것으로 나왔으며 재경선에서 1석은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표차가 적어 안심할 수 없는 상태다. 이 때문에 상원의원 1석을 확보하기 위한 치열한 레이스가 다시 전개되게 돼 있다. 조지아주는 대선 개표도 수(手)개표 재검표가 최종 확정된 상태다. 대통령 선거 재검표 결과도 주목되지만 그 결과와는 별도로 상원 재경선은 공화당으로선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런데 이 경우 트럼프의 정치적 존재감은 더욱이 배제될 수가 없다.
“트럼프의 낙선(落選)은 미국에 견제와 균형이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다.”
《역사의 종언》을 쓴 국제정치 전문가인 프랜시스 후쿠야마 스탠퍼드대학 교수의 이번 미국 대선 결과에 대한 평가다. 후쿠야마 교수가 지난 11월 9일 서울에서 열린 한 행사의 기조연설에서 한 말이었다.
그는 “민주당이 압승할 것이라고 봤던 전문가들의 예상은 빗나갔다”면서 “막판에 공화당 표가 결집해 교외 여성들과 라틴 히스패닉 유권자들에게서 트럼프 지지율이 예상보다 높게 나왔다”고 분석했다. 후쿠야마는 이런 점 때문에 “앞으로도 상당 기간 공화당과 트럼프의 영향력이 계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바이든의 승리를 기정사실화하며 당선 축하 메시지를 냈다. 그래서 트럼프는 결국 공화당에서도 버림받게 될 것이라는 얘기가 여전하다. 그러나 최소한 현재 시점으로서는 아니다. 지금으로선 트럼프가 공화당에서 정치적으로 버려지게 되는 것은 딱 한 가지 경우밖에 없을 것이다. 조지아주 상원의원 재선거에서 트럼프의 존재가 방해된다고 여겨질 경우다. 그런데 적어도 현재까지는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트럼프 현상은 트럼프 개인에 대한 평가와 호불호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사회적·정치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미국만이 아니라 좀 시야를 넓혀서 보면 더 뚜렷하게 포착된다.
한계에 부닥친 톨레랑스
미국 대선에 시선이 쏠려 있던 사이에 유럽의 프랑스에서 엽기적인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지난 10월 16일 한 교사가 목이 잘려 숨지는 사건이 발생한 데 이어 13일 만인 10월 29일 기도하기 위해 성당을 찾은 노파가 또 목이 잘려 살해당한 것이다. 두 사건의 범인은 모두 이슬람교도였다. 범인들은 만행을 저지른 후 모두 “알라후 아크바르(알라는 위대하다)”를 외쳤다.
프랑스는 톨레랑스(tolrance), 즉 ‘관용’을 자랑으로 삼아왔다. 유럽 국가들은 이민자와 난민의 수용에 개방적이고 적극적이었는데, 특히 프랑스는 일찍부터 그 정책의 선구적 모범이고자 해왔다. 문화와 종교의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원칙에 따라 이슬람 국가 출신에 대해서도 문호를 개방했다. 프랑스는 이슬람권인 알제리를 식민지로 지배하기도 한 만큼, 이를 당연하게 여기고 그들과의 공존에 익숙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개방성은 언젠가부터 역습(逆襲)을 받기 시작했다. 이슬람 출신들이 프랑스라는 국가적 정체성(正體性)에 동화(同化)하지 않은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이번에 참상이 발생한 프랑스만이 아니라 유럽 전역의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말레이시아의 전 총리 마하티르가 프랑스의 이 사건에 대해 놀라운 언급을 했다. “무슬림은 프랑스인들을 죽일 권리가 있다”는 글을 소셜미디어(SNS)에 올린 것이다. 물론 마하티르는 “프랑스인들이 식민 시절 수백만명의 사람을 죽였고, 그 희생자는 대부분 무슬림이었다”라는 것을 빠뜨린 채 자신의 언급이 왜곡되어 알려졌다고 주장했다. 당시 이슬람은 그런 희생에도 불구하고 결코 프랑스에 대해 복수를 일삼지 않았음을 상기시키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의 진의는 그런 것일 수 있겠다. 하지만 백번 이해한다 해도 과거를 이유로 그 과거의 일과 직접적 관계가 없는 현재의 어떤 사람을 살해해도 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망언(妄言)이다. 이것은 단순히 마하티르라는 사람의 몰상식의 문제가 아니다. 마하티르는 결코 양식 없는 무지몽매의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마하티르는 이슬람교도였다. 메워지지 않는 간극이 새삼 드러난 것이었다.
나타난 양상은 다르지만, 사실은 미국에서도 이 같은 문제가 내연(內燃)하고 있었다. 미국은 애초부터 이민자의 나라인 만큼 그 개방성은 미국의 본질적 정체성의 하나이기도 했다. 하지만 하나의 미국으로의 내적(內的) 통합은 외부의 평가나 기대만큼 원활하지는 않았다. 언젠가부터 한계에 봉착하며 사회적 피로감이 누적되어갔다.
트럼프는 불법체류자 등 불법 이민의 문제를 제기하며 장벽 구축까지 불사한 바 있다. 이민에 대해 예전과는 다른 관리를 하고자 했다. 그래서인지 트럼프에게는 재임 내내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비난이 따라다녔다. 이번 선거에서도 이 문제는 민주당의 주요 공세 포인트 중 하나였다. 사실 트럼프가 직접적으로 인종차별적인 언사를 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트럼프는 그러한 정치적 공격을 받았다.
이는 트럼프의 개인적 성향 문제가 아니었다. 트럼프의 내심이 어떻든 그에 대한 지지 세력의 주축이 압도적으로 백인이기 때문에 그도 그런 프레임으로 인식되고 있다.
예외가 있기는 하다. 라틴계 히스패닉들, 특히 주요 경합주였던 플로리다에서 트럼프 지지로 결집한 쿠바계 유권자들이었다. 이들은 사회주의 쿠바를 버리고 떠나온 만큼 반(反)좌익적 성향은 거의 제2의 본능이었다. 민주당은 부통령 후보 해리스가 상징하듯 급격히 좌경화(左傾化)된 모습을 보였다. 그에 대한 거부 반응이 쿠바계를 결집게 했다. 마치 북한 공산정권을 거부하고 38선을 넘었던 한국의 월남민(越南民)과 비슷한 셈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를 제외하면 트럼프 지지 세력의 주축은 단연 백인이었다. 이것은 간단한 간극이 아니다. 지금 미국 사회는 내적으로 깊은 정신적 균열과 격돌이 있다. 무엇보다도 미국의 전통적 백인층이 인종적·문화적 개방성에 지친 것이다.
미국에 대한 고마움이 없는 사람들
이들이 인종차별의 성향을 갖고 있을 수 있다.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는다 해도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트럼프 현상은 결코 그렇게 규정할 수 없다. 역으로 보면 그 문제가 드러난다.
이번 대선에서 흑인 유권자들의 대다수는 예상대로 바이든을 지지했다. 그런데 그 모두가 노예의 후손들은 아니었다. 그와는 전혀 상관없이 20세기 혹은 21세기에 들어 미국에 이주한 이들이 당연한 듯 트럼프를 비난하고 바이든을 지지했다. 흑인만이 아니라 다른 이주자들도 그런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들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모습이 있었다. 권리의 주장만큼 미국이라는 나라의 건국정신과 그 역사에 대한 고마움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양상은 BLM(Black Lives Matter·흑인 생명은 소중하다) 흑인 폭동에서 극명하게 나타났다. 그 자체에 대한 시시비비의 평가를 떠나 미국의 건국자들에 대한 공격이 난무했던 것이다. 파운딩 파더(Founding Father·미국 건국의 아버지)들도 노예주(奴主)들에 지나지 않았다며 그 조각상과 기념비들이 끌어내려지는 일이 발생했다. 전례(前例) 없는 일이었다.
노예의 후손들만 그랬다면 그나마 그럴 수도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같은 역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뒤늦게 미국에 이민 온 이들이 그런 모습을 보인 경우도 적지 않았다.
백인층의 분노
가정(假定)해서 이 같은 양상이 미국의 전통적 백인층들에겐 어떻게 비치고 있을지 생각해보자. 미국이 주는 기회는 누리면서도 기회가 있게 한 미국의 역사에 대해선 고마움을 보이지 않고, 조금만 불편하면 차별이라고 부르짖는다고 느낄 것이다. 전통적 백인 중산층의 입장에서, 특히 건국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삶을 이어온 백인층의 입장에선 받아들이기 힘든 간극이다.
경제적 고통과 위기감은 항상 일차적 문제다. 하지만 이것만이 아니다. 지금 미국은 국가적 정체성과 정신문화에서 깊은 균열이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갑작스러운 게 아니라 상당 기간을 두고 진행되었다. 따지고 보면 미국에서 복음주의 기독교인 층이 강력한 보수주의 정치 세력이 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전통적 가치가 다양성이라는 이름 아래 공격을 당하는 것과 미국의 국가적 존엄이 우습게 취급되는 것이 겹쳤다. 이에 대한 반발과 저항이 형성되었다. 저항감은 그것을 보여주기 위한 정치적 언어를 갈구하게 된다. 다른 정치적 언어가 주어지지 않을 때는 기왕의 중요한 정신문화가 그 역할을 한다. 복음주의 기독교가 그 역할을 했다.
민주당은 줄곧 트럼프가 미국을 분열과 대립으로 끌고 가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이제 바이든은 균열의 치유와 통합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 사회 저변(底邊)의 균열과 대립은 트럼프가 만든 게 아니라 누적된 피로현상이다. 미국 대선의 선거 결과는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되든 확정 지어지긴 할 것이다. 하지만 바이든의 당선으로 마무리된다 해도 트럼프 현상이 그것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인이 美 대선에 관심 높았던 이유
이번 미국 대선에 대한 관심은 한국에서도 매우 높았다. 미국이 갖고 있는 세계적 비중과 영향력으로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한미(韓美)관계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증명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미국 대선에 대한 관심은 좀 많이 뜨거웠다.
“김정은과 사랑에 빠졌다”는 언사를 거리낌 없이 하는 트럼프의 대북(對北)정책에 깊은 유감을 갖는 쪽에선 그의 낙선을 바랐다. 그러나 트럼프의 그 같은 망측스러운 언사에도 불구하고 그의 당선을 바라는 입장도 매우 강했다. ‘트럼프가 될 것이다 아니다, 바이든이 되는 게 한국에 유리하다 아니다’ 등의 공방이 보수우파 진영 내에서 격렬하게 이어졌다.
하지만 트럼프나 바이든 어느 쪽의 외교안보 노선이 한국에 유리할 것이라는 건 사실 냉철한 ‘판단’이기보다는 ‘주장’일 수밖에 없다.
우선 지금 당선이 유력해 보이는 바이든이 과연 어떤 정책을 쓸 것인지는 그때 가봐야 확인이 된다. 그리고 어떤 정책적 선택의 유불리 파장은 그 당사자의 의도와도 독립된 것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트럼프의 대북정책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트럼프의 경박해 보이는 말이 어떠하든, 김정은에게 국제 정치 무대에서 행세할 수 있게 한 것을 어떻게 평가하든, 대북 제재는 여전히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 점은 바이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민주당 정권 시절에도 북한의 핵무장은 저지하지 못했다. 민주당이 고의적으로 방치했을 리는 없다. 바이든의 대북정책이 트럼프에 비해 강경해질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하여 그것이 북한을 무력화(無力化)시키는 효과를 보일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바이든의 외교안보정책이 한국 보수우파의 기대를 배신하게 될 것이라고 보는 것도 성급하다.
한때 트럼프에 대한 친(親)러시아 음모론이 난무했다. 민주당 측의 날조된 정치적 공세의 혐의가 짙지만 사실이 어떻든 트럼프는 오히려 친러정책을 쓰지 않았다. 현재는 바이든이 친중(親中)이라는 주장이 난무하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의심받는다면 오히려 더 몸조심할 가능성이 높다. 바이든은 아태(亞太) 지역의 몇몇 정상과의 통화에서 전통적인 ‘동맹 강화’ ‘인도·태평양 지역 안보’ ‘민주주의 강화’를 강조했다. 바이든의 내심이 어떻든, 그의 친중 커넥션 혐의가 어떻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보수우파 싱크탱크 헤리티지재단의 창립자인 에드윈 퓰너는 지난 11월 6일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미·중 간에 ‘좋았던 옛 시절’은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투자를 하려면 서로 동등한 파트너가 돼야 하고, 교역을 하려면 상대가 공정해야 하는데 중국은 그렇지 않았다”며 “누가 미국 대통령이 되든 미·중 관계는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그는 “바이든은 분명히 트럼프보다 ‘나이스(nice)’하게 말하기 때문에 거기서 위안을 찾는 사람도 있을 것”이지만 “미·중 관계의 근간은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언명했다.
“권력은 이념에서 나온다”
한국의 우파 진영 내에서의 트럼프 동조 기류는 그 대북정책에 대한 기대가 아니었다. 반중(反中) 노선에 대한 공감도 있었지만, 바탕에 있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근원적인 문제였다.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격돌로 접어들고 있는 가치관의 문제다. 미국에서의 트럼프 현상이 그러하듯, 한국에서도 ‘트빠(트럼프빠)’ 현상이 나타난 것은 가치관의 좌익적 폭주(暴走)현상에 대한 격렬한 반감(反感)의 표출이 더 핵심이었다.
이것은 결코 빗나간 감정적 투사(投射)가 아니다. 한국도 지금 저변에서부터 사회를 곪아가게 하고 있는 정치적·사회적 가치관의 붕괴 양상을 질리도록 겪고 있다. 외교안보 문제도 중요하지만 이 또한 절대로 간과할 수 없는 중대한 문제다. 바이든이든 트럼프든 그 당락의 결정은 미국의 몫이다. 하지만 반면교사(反面敎師)로 더욱이 생생하게 목도하게 된 가치관의 문제는 우리 몫이다.
마오쩌둥(毛澤東)은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했지만, 권력은 근본적으로는 이념과 가치관에서 나온다. 총구에서 나오는 것은 권력의 총알일 뿐이고 사실은 이념과 가치관이 그 탄창이다. 놓쳐서는 안 되는 문제다.⊙
심오한 원리도 아니다. 따지고 보면 평범한 상식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관심이 가는 어떤 일이 있으면 예측을 해보곤 한다. 그 한계를 몰라서가 아니다. 선호(選好)와 기대(期待)가 있기 때문이다. 관심을 갖는 것부터가 그렇다. 아무런 선호와 기대도 없다면 애초에 관심도 갖지 않게 된다. 그래서 예측은 기대와 뒤섞이기 일쑤다.
물론 선호와 기대와는 별도로 결과에 대한 예측에선 냉정과 객관을 유지하려는 이들도 당연히 있다. 그러나 그래도 오류(誤謬)의 가능성은 여전히 있게 된다. 모든 변수(變數)를 파악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냉정과 객관도 자기 합리화를 위한 경우가 드물지 않다. 스스로 의식하든 못 하든 그렇다.
이성(理性)이 없어서가 아니다. 하지만 이성에 대한 과신(過信)은 이성적이지 않다. 데이비드 흄(David Hume·1711~1776)은 “이성은 감정의 노예”라고까지 했다. 이성은 종종 주관적 원망(願望) 아래 놓인다. 정치적 사안인 경우는 특히 더 그러하다. 이번 미국 대선(大選)의 경우는 어떨까?
선거 예측이 적중은 했지만…
이번 미국 대선의 결과는 미국의 주류(主流) 언론과 여론조사 기관들이 예측한 바대로 바이든의 승리로 나오고 있다. 예측이 적중한 셈이긴 하다. 하지만 이것은 표면이다. 예측이 적중한 듯 보이기는 하지만 진통(陣痛)이 만만치 않다. 트럼프가 부정선거 시비를 제기하며 승복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 그런 사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00년 부시와 고어가 맞붙었던 선거 때도 그런 일이 있기는 했다. 트럼프가 쉬이 승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이미 있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의 양상은 예측된 바를 좀 많이 벗어나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트럼프의 득표력이 만만치 않음이 드러났다. 그리고 경합주(競合州)들에서의 시비도 만만치 않다.
트럼프라는 사람 개인의 인간성 문제라고 하면 결론은 간단하다. 그런데 공화당이 함께 대응을 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트럼프와 공화당의 태도에 대한 옳고 그름의 시비(是非)를 떠나 이제는 공식적인 정치적 사안일 수밖에 없다. 단시간 내에 원만하게 마무리될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예상 밖의 상황이다.
사실 따지자면 미국 주류 언론 등의 예측부터가 주관적 원망을 품고 있기도 했다. 그들도 그 점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정치적 진통이 만만찮게 이어질 것이라 예측하지는 못한 듯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러지 않길 바랐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이 진통은 쉬이 마무리될 것 같지 않다. 그러기 힘든 정치적 상황이 있기 때문이다.
아직 대선은 안 끝났다?
트럼프는 부정선거 시비를 제기하며 핵심 경합주 등에 대해 소송전(訴訟戰)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 소송은 주(州)법원에서는 일단 패소(敗訴)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2~3심으로 이어가는 것은 물론 연방대법원에 상고(上告)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노림수가 있다는 분석이 있다. 핵심 경합주의 당선인 확정을 저지하는 전략이라는 것이다.
미국 대선은 전 국민 투표 후 주별로 선출된 선거인단이 그 주에서 승리한 후보에 최종 투표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 절차가 순조롭게 진행되려면 주정부가 법적으로 11월 20일까지 선거 결과를 확정 지어야 한다. 12월 8일까지 각 주가 선거인단을 확보해야 하며 12월 14일 538명의 선거인단이 모여서 270명 이상을 받는 사람을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내년 1월 6일 의회에서 승인해야 한다.
그런데 소송이 진행되는 경합주는 결과를 확정지을 수 없게 될 수 있다. 만약 주 당국이 공식 승자(勝者)를 발표하지 못하거나 확정 시한을 넘기게 되면 헌법에 따라 선거인단 임명권은 주의회로 넘어가게 된다. 현재까지 트럼프 캠프는 펜실베이니아주, 미시간주, 애리조나주에서 선거 결과 확정을 막아달라는 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모두 주의회에서 공화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곳이다. 즉 만약 법적 분쟁으로 시한을 넘겨 주의회에서 선거인단을 결정하게 되면 공화당이 이기게 될 수 있다.
물론 이런 과정을 민주당 측이 마냥 지켜볼 리는 없다. 분쟁과 다툼으로 인해 주의회에서도 선거인단을 확정 짓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면 12월 14일 최종 투표일까지 대통령 선거인단 과반(過半)을 확보한 후보가 나오지 못하게 된다. 이 경우 대통령 선출 권한은 연방하원으로 넘어간다. 연방하원은 주별 인구 비례로 총 435명으로 구성돼 있지만, 대통령 선출에는 주별 1명씩 총 50명이 투표한다. 이 가운데 26명을 확보한 후보가 이긴다.
현재 주별로 하원 다수당을 계산하면 공화당은 26명, 민주당은 22명인 것으로 추산된다. 전체 연방하원 의원 수는 민주당이 많지만 한 주에 여러 의원이 모여 있는 곳이 많아, 의원들이 분산돼 있는 공화당에 밀린다. 그래서 이 경우에도 결국 공화당의 트럼프가 최종 승리를 하게 된다.
물론 사실은 트럼프 캠프 참모들조차 이 전략의 성공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다는 얘기도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이런 시나리오를 논의하는 주목적은 트럼프 대통령을 달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분석은 아무래도 반(反)트럼프 측의 바람으로 보인다.
결국에는 공화당조차도 트럼프를 외면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들 했다. 심지어 트럼프 가족 내에서의 불화설까지 나돌기도 했다. 트럼프는 정치적으로 완전히 고립되고 버림받게 될 것이라는 전망도 이어졌다. 그런데 이 같은 예상과 달리 공화당이 트럼프를 중심으로 결속하는 움직임이 확연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에는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조지아州 상원의원 선거
이번 미국 선거는 대통령 선거만이 아니라 상원・하원 의원도 함께 선거가 치러졌다. 상원은 공화당이 우위에 있었고, 하원은 민주당이 절대 과반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민주당은 이번 상하원 선거에서 기대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하원에서는 5석을 상실했으며 상원에서도 현재로서는 과반 획득에 성공하지 못했다. 총 100석 가운데 현재까지 공화당이 50석 민주당이 48석을 확정 지었다. 남은 2석은 조지아주 상원의원이다. 그런데 조지아주의 2석은 이번 선거의 개표로 확정 지을 수 없게 되었다.
조지아주는 상원의원에 당선이 되려면 50% 이상 표를 얻도록 돼 있다. 50%를 득표하지 못한 경우에는 재경선을 해야 한다. 조지아주의 상원의원 2석은 개표율 99% 상태에서 1석은 공화 49.71%, 민주 47.96%였다. 나머지 1석은 보궐선거였는데 모두 20명의 공화·민주·무소속 후보가 난립하여 민주 32.9%, 공화 25.9%로 2석 모두 과반 획득이 나오지 않았다. 따라서 2석 모두 재경선을 해야 한다. 이 재경선은 2021년 1월 5일 치러지게 돼 있다.
만약 공화당이 조지아주 상원의원 2석을 모두 획득하면 총 52석이 되어 상원에서 과반수를 확보하게 된다. 반대로 만약 이 2석을 모두 민주당이 갖게 되면 의석은 50대 50이지만 민주당 바이든의 대통령 당선이 확정될 경우 부통령이 상원의장으로 캐스팅보트를 갖게 되기 때문에 상원도 민주당이 장악하게 된다. 민주당은 하원에서 5석을 상실했지만 여전히 과반을 확보하고 있다. 따라서 조지아주의 상원의원 재선거에서 공화당이 2석을 모두 잃게 되면 바이든의 당선이 확정될 경우 대통령·상원·하원 모두를 민주당이 장악하게 된다. 때문에 공화당은 조지아주 재경선에서 적어도 1석은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
현재의 개표 결과를 기준으로 보면 일단은 공화당이 조지아주에서 상원 1석은 우세한 것으로 나왔으며 재경선에서 1석은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표차가 적어 안심할 수 없는 상태다. 이 때문에 상원의원 1석을 확보하기 위한 치열한 레이스가 다시 전개되게 돼 있다. 조지아주는 대선 개표도 수(手)개표 재검표가 최종 확정된 상태다. 대통령 선거 재검표 결과도 주목되지만 그 결과와는 별도로 상원 재경선은 공화당으로선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런데 이 경우 트럼프의 정치적 존재감은 더욱이 배제될 수가 없다.
“견제와 균형의 원리 작동”
“트럼프의 낙선(落選)은 미국에 견제와 균형이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다.”
《역사의 종언》을 쓴 국제정치 전문가인 프랜시스 후쿠야마 스탠퍼드대학 교수의 이번 미국 대선 결과에 대한 평가다. 후쿠야마 교수가 지난 11월 9일 서울에서 열린 한 행사의 기조연설에서 한 말이었다.
그는 “민주당이 압승할 것이라고 봤던 전문가들의 예상은 빗나갔다”면서 “막판에 공화당 표가 결집해 교외 여성들과 라틴 히스패닉 유권자들에게서 트럼프 지지율이 예상보다 높게 나왔다”고 분석했다. 후쿠야마는 이런 점 때문에 “앞으로도 상당 기간 공화당과 트럼프의 영향력이 계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바이든의 승리를 기정사실화하며 당선 축하 메시지를 냈다. 그래서 트럼프는 결국 공화당에서도 버림받게 될 것이라는 얘기가 여전하다. 그러나 최소한 현재 시점으로서는 아니다. 지금으로선 트럼프가 공화당에서 정치적으로 버려지게 되는 것은 딱 한 가지 경우밖에 없을 것이다. 조지아주 상원의원 재선거에서 트럼프의 존재가 방해된다고 여겨질 경우다. 그런데 적어도 현재까지는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트럼프 현상은 트럼프 개인에 대한 평가와 호불호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사회적·정치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미국만이 아니라 좀 시야를 넓혀서 보면 더 뚜렷하게 포착된다.
한계에 부닥친 톨레랑스
무슬림 청소년에 의해 역사 교사 사뮈엘 파티가 참혹하게 살해된 후 프랑스 전역에서는 프랑스인 테러 만행을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사진=AP/뉴시스 |
프랑스는 톨레랑스(tolrance), 즉 ‘관용’을 자랑으로 삼아왔다. 유럽 국가들은 이민자와 난민의 수용에 개방적이고 적극적이었는데, 특히 프랑스는 일찍부터 그 정책의 선구적 모범이고자 해왔다. 문화와 종교의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원칙에 따라 이슬람 국가 출신에 대해서도 문호를 개방했다. 프랑스는 이슬람권인 알제리를 식민지로 지배하기도 한 만큼, 이를 당연하게 여기고 그들과의 공존에 익숙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개방성은 언젠가부터 역습(逆襲)을 받기 시작했다. 이슬람 출신들이 프랑스라는 국가적 정체성(正體性)에 동화(同化)하지 않은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이번에 참상이 발생한 프랑스만이 아니라 유럽 전역의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말레이시아의 전 총리 마하티르가 프랑스의 이 사건에 대해 놀라운 언급을 했다. “무슬림은 프랑스인들을 죽일 권리가 있다”는 글을 소셜미디어(SNS)에 올린 것이다. 물론 마하티르는 “프랑스인들이 식민 시절 수백만명의 사람을 죽였고, 그 희생자는 대부분 무슬림이었다”라는 것을 빠뜨린 채 자신의 언급이 왜곡되어 알려졌다고 주장했다. 당시 이슬람은 그런 희생에도 불구하고 결코 프랑스에 대해 복수를 일삼지 않았음을 상기시키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의 진의는 그런 것일 수 있겠다. 하지만 백번 이해한다 해도 과거를 이유로 그 과거의 일과 직접적 관계가 없는 현재의 어떤 사람을 살해해도 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망언(妄言)이다. 이것은 단순히 마하티르라는 사람의 몰상식의 문제가 아니다. 마하티르는 결코 양식 없는 무지몽매의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마하티르는 이슬람교도였다. 메워지지 않는 간극이 새삼 드러난 것이었다.
미국에서도 피로감이 나타나고 있다
나타난 양상은 다르지만, 사실은 미국에서도 이 같은 문제가 내연(內燃)하고 있었다. 미국은 애초부터 이민자의 나라인 만큼 그 개방성은 미국의 본질적 정체성의 하나이기도 했다. 하지만 하나의 미국으로의 내적(內的) 통합은 외부의 평가나 기대만큼 원활하지는 않았다. 언젠가부터 한계에 봉착하며 사회적 피로감이 누적되어갔다.
트럼프는 불법체류자 등 불법 이민의 문제를 제기하며 장벽 구축까지 불사한 바 있다. 이민에 대해 예전과는 다른 관리를 하고자 했다. 그래서인지 트럼프에게는 재임 내내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비난이 따라다녔다. 이번 선거에서도 이 문제는 민주당의 주요 공세 포인트 중 하나였다. 사실 트럼프가 직접적으로 인종차별적인 언사를 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트럼프는 그러한 정치적 공격을 받았다.
이는 트럼프의 개인적 성향 문제가 아니었다. 트럼프의 내심이 어떻든 그에 대한 지지 세력의 주축이 압도적으로 백인이기 때문에 그도 그런 프레임으로 인식되고 있다.
예외가 있기는 하다. 라틴계 히스패닉들, 특히 주요 경합주였던 플로리다에서 트럼프 지지로 결집한 쿠바계 유권자들이었다. 이들은 사회주의 쿠바를 버리고 떠나온 만큼 반(反)좌익적 성향은 거의 제2의 본능이었다. 민주당은 부통령 후보 해리스가 상징하듯 급격히 좌경화(左傾化)된 모습을 보였다. 그에 대한 거부 반응이 쿠바계를 결집게 했다. 마치 북한 공산정권을 거부하고 38선을 넘었던 한국의 월남민(越南民)과 비슷한 셈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를 제외하면 트럼프 지지 세력의 주축은 단연 백인이었다. 이것은 간단한 간극이 아니다. 지금 미국 사회는 내적으로 깊은 정신적 균열과 격돌이 있다. 무엇보다도 미국의 전통적 백인층이 인종적·문화적 개방성에 지친 것이다.
미국에 대한 고마움이 없는 사람들
이들이 인종차별의 성향을 갖고 있을 수 있다.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는다 해도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트럼프 현상은 결코 그렇게 규정할 수 없다. 역으로 보면 그 문제가 드러난다.
이번 대선에서 흑인 유권자들의 대다수는 예상대로 바이든을 지지했다. 그런데 그 모두가 노예의 후손들은 아니었다. 그와는 전혀 상관없이 20세기 혹은 21세기에 들어 미국에 이주한 이들이 당연한 듯 트럼프를 비난하고 바이든을 지지했다. 흑인만이 아니라 다른 이주자들도 그런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들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모습이 있었다. 권리의 주장만큼 미국이라는 나라의 건국정신과 그 역사에 대한 고마움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양상은 BLM(Black Lives Matter·흑인 생명은 소중하다) 흑인 폭동에서 극명하게 나타났다. 그 자체에 대한 시시비비의 평가를 떠나 미국의 건국자들에 대한 공격이 난무했던 것이다. 파운딩 파더(Founding Father·미국 건국의 아버지)들도 노예주(奴主)들에 지나지 않았다며 그 조각상과 기념비들이 끌어내려지는 일이 발생했다. 전례(前例) 없는 일이었다.
노예의 후손들만 그랬다면 그나마 그럴 수도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같은 역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뒤늦게 미국에 이민 온 이들이 그런 모습을 보인 경우도 적지 않았다.
백인층의 분노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에 있는 남북전쟁 당시 남군 사령관 로버트 리 장군의 동상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인종차별반대주의자들. 이런 시위에 대한 반감도 적지 않다. 사진=AP/뉴시스 |
경제적 고통과 위기감은 항상 일차적 문제다. 하지만 이것만이 아니다. 지금 미국은 국가적 정체성과 정신문화에서 깊은 균열이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갑작스러운 게 아니라 상당 기간을 두고 진행되었다. 따지고 보면 미국에서 복음주의 기독교인 층이 강력한 보수주의 정치 세력이 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전통적 가치가 다양성이라는 이름 아래 공격을 당하는 것과 미국의 국가적 존엄이 우습게 취급되는 것이 겹쳤다. 이에 대한 반발과 저항이 형성되었다. 저항감은 그것을 보여주기 위한 정치적 언어를 갈구하게 된다. 다른 정치적 언어가 주어지지 않을 때는 기왕의 중요한 정신문화가 그 역할을 한다. 복음주의 기독교가 그 역할을 했다.
민주당은 줄곧 트럼프가 미국을 분열과 대립으로 끌고 가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이제 바이든은 균열의 치유와 통합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 사회 저변(底邊)의 균열과 대립은 트럼프가 만든 게 아니라 누적된 피로현상이다. 미국 대선의 선거 결과는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되든 확정 지어지긴 할 것이다. 하지만 바이든의 당선으로 마무리된다 해도 트럼프 현상이 그것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인이 美 대선에 관심 높았던 이유
이번 미국 대선에 대한 관심은 한국에서도 매우 높았다. 미국이 갖고 있는 세계적 비중과 영향력으로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한미(韓美)관계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증명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미국 대선에 대한 관심은 좀 많이 뜨거웠다.
“김정은과 사랑에 빠졌다”는 언사를 거리낌 없이 하는 트럼프의 대북(對北)정책에 깊은 유감을 갖는 쪽에선 그의 낙선을 바랐다. 그러나 트럼프의 그 같은 망측스러운 언사에도 불구하고 그의 당선을 바라는 입장도 매우 강했다. ‘트럼프가 될 것이다 아니다, 바이든이 되는 게 한국에 유리하다 아니다’ 등의 공방이 보수우파 진영 내에서 격렬하게 이어졌다.
하지만 트럼프나 바이든 어느 쪽의 외교안보 노선이 한국에 유리할 것이라는 건 사실 냉철한 ‘판단’이기보다는 ‘주장’일 수밖에 없다.
우선 지금 당선이 유력해 보이는 바이든이 과연 어떤 정책을 쓸 것인지는 그때 가봐야 확인이 된다. 그리고 어떤 정책적 선택의 유불리 파장은 그 당사자의 의도와도 독립된 것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트럼프의 대북정책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트럼프의 경박해 보이는 말이 어떠하든, 김정은에게 국제 정치 무대에서 행세할 수 있게 한 것을 어떻게 평가하든, 대북 제재는 여전히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 점은 바이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민주당 정권 시절에도 북한의 핵무장은 저지하지 못했다. 민주당이 고의적으로 방치했을 리는 없다. 바이든의 대북정책이 트럼프에 비해 강경해질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하여 그것이 북한을 무력화(無力化)시키는 효과를 보일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바이든의 외교안보정책이 한국 보수우파의 기대를 배신하게 될 것이라고 보는 것도 성급하다.
한때 트럼프에 대한 친(親)러시아 음모론이 난무했다. 민주당 측의 날조된 정치적 공세의 혐의가 짙지만 사실이 어떻든 트럼프는 오히려 친러정책을 쓰지 않았다. 현재는 바이든이 친중(親中)이라는 주장이 난무하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의심받는다면 오히려 더 몸조심할 가능성이 높다. 바이든은 아태(亞太) 지역의 몇몇 정상과의 통화에서 전통적인 ‘동맹 강화’ ‘인도·태평양 지역 안보’ ‘민주주의 강화’를 강조했다. 바이든의 내심이 어떻든, 그의 친중 커넥션 혐의가 어떻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보수우파 싱크탱크 헤리티지재단의 창립자인 에드윈 퓰너는 지난 11월 6일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미·중 간에 ‘좋았던 옛 시절’은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투자를 하려면 서로 동등한 파트너가 돼야 하고, 교역을 하려면 상대가 공정해야 하는데 중국은 그렇지 않았다”며 “누가 미국 대통령이 되든 미·중 관계는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그는 “바이든은 분명히 트럼프보다 ‘나이스(nice)’하게 말하기 때문에 거기서 위안을 찾는 사람도 있을 것”이지만 “미·중 관계의 근간은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언명했다.
“권력은 이념에서 나온다”
한국의 우파 진영 내에서의 트럼프 동조 기류는 그 대북정책에 대한 기대가 아니었다. 반중(反中) 노선에 대한 공감도 있었지만, 바탕에 있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근원적인 문제였다.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격돌로 접어들고 있는 가치관의 문제다. 미국에서의 트럼프 현상이 그러하듯, 한국에서도 ‘트빠(트럼프빠)’ 현상이 나타난 것은 가치관의 좌익적 폭주(暴走)현상에 대한 격렬한 반감(反感)의 표출이 더 핵심이었다.
이것은 결코 빗나간 감정적 투사(投射)가 아니다. 한국도 지금 저변에서부터 사회를 곪아가게 하고 있는 정치적·사회적 가치관의 붕괴 양상을 질리도록 겪고 있다. 외교안보 문제도 중요하지만 이 또한 절대로 간과할 수 없는 중대한 문제다. 바이든이든 트럼프든 그 당락의 결정은 미국의 몫이다. 하지만 반면교사(反面敎師)로 더욱이 생생하게 목도하게 된 가치관의 문제는 우리 몫이다.
마오쩌둥(毛澤東)은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했지만, 권력은 근본적으로는 이념과 가치관에서 나온다. 총구에서 나오는 것은 권력의 총알일 뿐이고 사실은 이념과 가치관이 그 탄창이다. 놓쳐서는 안 되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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