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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 있는 자유와 기업 무를 자들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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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oa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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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 있는 자유와 기업 무를 자들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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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지 않는 예배와 주기적 금식으로 자유민주 복음통일을 준비하는 무명의 청년들이 대한민국과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1. 한반도 공산당선언


하나의 유령이 ‘한반도’를 떠돌고 있다-공산주의라는 유령이. 그 유령이 어느날 두 지도자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두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 인물들이 상징하는 (1) 한 세대의 정신, 그리고 (2) 그 세대가 가진 역사에 대한 태도에 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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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범수용소에 갇힌 인원을 포함한 북한주민의 천부인권을 무시한 회담의 본질은 평화가 아닌 악의 현상유지로 보아야 한다.


한 사람은 최고 존엄 또는 위대한 지도자라는 말로 북한의 전인민을 속였다. 다른 한 사람은 수 많은 군중(인민) 앞에서 자신은 ‘남쪽 대통령’이라 부른 반면, 다른 이를 ‘국무위원장’이라고 추켜 세우며 그 스스로의 지위와 한 국가의 격을 자발적으로 할인(voluntarily discount)하기에 이르렀다. 이 두 사람은 전세계로 중계되는 카메라 앞에서 부등켜 안았던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상호신뢰하는 친구라기 보다 각자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일종의 계약관계로 봄이 더 알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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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기와 태극기의 정반합으로 평화를 도모할 수 있다는 신호는 거대한 사기극과 같다.


2. 공산주의(사회주의)라는 이름의 유령


이제 공산주의 유령의 두 가지 특징을 살펴보자. 첫째, 이 유령은 보이지 않지만 아직 살아있다. 앞서 인용했던 마르크스-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의 첫 문장("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공산주의라는 유령이")과 같이 이것은 우리 곁을 배회한다. 이 공산주의, 또는 본질적으로 그것과 다르지 않은 사회주의라는 이름의 유령은 쥐죽은 듯 숨어있다가도 그 이름을 부르거나, 마음으로 원하기만하면 언제든 한 달음에 달려와 인간의 정신을 사로잡는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기본적으로 이것은 인민의 분노와 슬픔을 빌미로 위력을 떨치지만, 그 실상을 아는 어느 누구의 신랄한 조롱 앞에서는 오히려 맥 없이 무너져 버리는 기이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이 유령은 현실의 투쟁에 실패했을 때마다 뭇 사람들의 조롱 때문에 그 몸을 숨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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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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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생명을 지운 마르크스의 사회 운동과 인류 공영에 기여한 레이건의 자유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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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와 레닌을 책으로 배운 자를 공산주의자라 부르고, 그들의 사상을 올바로 이해한 자를 반공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다(로널드 레이건).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저 이념에 많은 이들이 속고 있다. 잘못된 이념을 가진 사람들이 주체, 민족, 겨레, 자주, 평화, 인권 등의 단어의 조합을 통해 재생산하고 유통하는 부드러운 언어들에 스며있는 거짓 담론에 대해 우리는 철저히 무관심했다. 또 잠시 주의를 기울였다가도 그만 설마하고 지나쳤다. 그 결과 이념은 문화가 되어 다음세대를 포함한 이 땅의 수 많은 청년들의 미래를 위협하고있다.


둘째, 이 유령은 거짓의 영 또는 거짓말의 영이다. 앞서 언급한 인물들이 대변하는 두 무리는 자기들의 추종자는 앞세워 환호하게 하고 정치적 반대자는 입을 막거나 뒤로 가두는 등의 ‘이중 행태’를 서슴지 않았다. 북한의 한 무리는 주체와 자주의 이름으로 자유민주체제는 혐오했으나, 성과만큼은 질투한 나머지 그 체제의 열매를 훔칠 기회를 노리고 있다. 남쪽의 또 한 무리는 감성적 선동으로 미처 오지 않은 평화를 두고 벌써 그것이 일상이 되었다고 말하기에만 분주했다. 그들은 이 나라가 ‘포용국가’가 될 것을 선언 했지만, 정작 그들이 껴안은 것은 반(反)문명적 가치와 반(反)자유민주체제였다. 이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악을 포옹(hug)하는 것은 포용이 아니라 악행이고, 리더십의 악행은 공동체를 해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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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향 공산주의자 신영복을 사상적 아비로 모시는 자들이 대한민국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 신영복의 사상이 문화 예술 및 심지어 신학교에 침투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3. 그들이 선언한 ‘평화롭고 번영한 나라’는 없다


그렇게 유지하는 리더십과 지위는 인민 또는 대중이 결코 신뢰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지속되기 힘들다. 다음의 ‘존로크’ (John Locke)의 말에 따라 이들의 지도력을 잠시 테스트해 보자. “가족의 아버지가 자식들을 사랑하고 보살펴주면서도 자식들로 하여금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통치자가 진심으로 그의 인민의 복지 그리고 인민과 법의 보존을 꾀하면서도 인민들로 하여금 그것을 보고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 역시 불가능한 법이다.” (존 로크 <통치론(제2론)> 18장. 전제에 관하여 209절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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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로크의 <통치론>


로크의 말에 비춰볼 때, 도무지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하는 그들을 우리는 ‘역사의 마법사’라 부를 수 있다. 왜냐하면 지금껏 아무도 그들이 약속한 ‘평화롭고 번영한 나라’를 단 한 번도 보고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도자의 입술로는 진심으로 인민의 복지를 꾀했으나, 실상 아무도 경험하지 못하는 말로만 좋은 나라는 그저 허상(illusion)에 불과하다. 다만 그들이 약속했던 자리엔 마법처럼 사라진 인간다운 삶에 대한 탄식이 이어진다. 그리고 당이 주도하는 (1) 사회적 필요와 (2) 여론이라는 이름을 빌린 ‘다수의 폭정’은 개인의 창의와 존엄을 보란듯이 짓이긴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할 것은 태초 이래 잠들지 않는 역사의 눈은 지금도 그들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4. 공산주의 마법의 해독제, 리버티(Liberty) = 자유(Freedom) + 책임(Responsibility)


최근들어 시대가 변했으니 ‘보수’라는 단어를 쓰지 말자는 말이 사회 지도층을 중심으로 나오고있다. 그러나 변화하는 시대를 잘 대처하고 돌파하기 위해서 더욱이 보수주의자의 자유에 대한 다음과 같은 개념(설명)은 필요하다. “보수주의자의 자유는 책임 있는 자유, 인간의 존엄과 진리라는 가치 아래의 자유로 결코 방종이 아닙니다.” (김은구 트루스포럼 대표, <미래한국> 인터뷰 내용 중) 


이제 더 많은 청년들이 깨어나야 한다. 다가오는 세대를 저들의 마법으로부터 지키고 깨우기 위해 두 가지 정신이 필요한데 그것은 바로 자유와 책임이다. 자유(freedom)에 책임(responsibility)이 더해질 때 비로소 참 자유(liberty)가 있다. 그러나 어리석게도, 건국의 역사와 부국의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 소위 민주(democracy)라는 초등적 접근은 그저 어린 아이의 방종에 지나지 않는다.


기독교 보수주의자인 댄 크랜쇼 미 연방 하원의원은 법치를 준수하는 책임 있는 자유의 중요성과 인간의 한계를 겸허히 인정하는 보수주의적 가치를 설명했다.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생각은 이념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개인의 생각 자체는 억지로 바꿀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저들의 후손에게 참 자유(liberty)를 전하기 위해 우리가 대신 외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보수주의자의 양심 아닐까? 따라서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협의의 ‘보수’가 아닌 인류애와 우리 삶의 질서를 보전하고자 하는 ‘보수주의자’로서 우리는 그 후손들을 위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당신의 선대의 말과 구호와는 달리, 기회의 평등은 무시한 채 결과적 평등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만들 수 있는 ‘다 함께 잘사는 나라’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책임이 없는 자유는 반드시 그 사회를 타락 시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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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보수주의 2020 컨퍼런스>


5. 열매 없는 시대정신을 극복할 책임 있는 자유


또한 청년들은 이제 더욱 ‘책임 있는 자유’에 대해 치열하게 배우고 고민함으로 새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 그러므로,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는 철지난 구호는 보란듯이 거부해야한다. 또한 “모두가 함께 잘사는 나라”를 꿈꾸자는 지도자의 천박한 선동에도 굴하지 않고 청년들은 이제 다른 길을 가야한다. 젊은시절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뛰었다는 지도자들은 실상 당과 여론의 눈치를 보며 자신의 이름을 높이는 일에 매진하는 모습이다. 빅테크를 비롯한 주류 언론은 어떤가. 일반이 사유할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 주류 미디어 그룹이 일상적으로 요약 및 편집해서 떠 먹여주는 방식으로 만들어가는 시대정신과, 자의적이고 편향적인 표현의 규제는 갈수록 진실과 공정을 상실해 간다. 그러나 만약 보도에 진실이 빠진채 의도적인 담론만 남은 것을 대중이 알아차리는 순간 각성된 시민은 곧 대안을 찾아나설 것이다.


예를들어, 만약 평화라는 시대정신이 지속가능했다면 북한 당국의 폭파 전까지 남북공동연락사무소에 걸려있던 일명 평화의 상징 ‘한반도기’는 무사했을 것이다. 그렇게 한반도기는 원칙이 결여된 감성적 대화와 남북간의 비대칭적 무장해제라는 위험한 내기(betting)를 통해서라도 진정성 있는 평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했을 것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반대의 일이 일어났다. 지나간 가짜 평화 쇼를 통해 다시 한번 책임 있는 자유를 생각한다. 책임이 없이는 진정한 자유를 기대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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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함에 따라 북한 당국은 평화의 상징 한반도기가 단지 통일 선전술이었음을 스스로 증명했다.


6. 이승만 대 김일성, 자유인과 노예의 갈림길


그렇다면 아무도 대신 싸워주지 않는 전체주의 유령과의 역사투쟁에서 우리의 선택은 무엇인가? 간단한 예로 대한민국 사회에는 이승만과 김일성 사이에서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거나, 그 질문자체가 워낙 권위주의적이라서 나는 답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만일 한 세대만 놓고 본다면 굳이 피로한 역사투쟁 없이도 우리의 삶은 여전히 낭만적일 수있다. 또 현상유지의 관점에서도 여전히 별탈없이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역사의 선택은 후대의 미래를 좌우한다. 분명한 것은 역사에 대한 권리포기는 도둑에게 칼을 선물하는 것과 같다. 그 결과 다음세대가 살아갈 이 땅은 자유를 상실한 ‘노예의 땅’이 될지도 모른다. 만약 그것이 우리 개개인의 자발적 선택의 결과라면, 역사의 신은 그 길 마저도 우리 인간에게 내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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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과의 역사투쟁>. 황성준 연구위원은 대학시절 심취했던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버리고 보수주의 사상의 선각자로 거듭났다.


지난 70여년간 대한민국에서 계속되고 있는 정신의 전쟁의 본질은 무엇인가? 전환기정의연구원 김미영 원장에 따르면, 이것은 이승만과 김일성의 대결이다. 김일성은 자신을 태양신으로 천명하고 인민을 억압하고 압살함으로써 진리를 조롱했다. 3대 세습 김씨 일가는 유대-기독교 문명적 관점에서는 국가를 파괴하고 인민을 살해하는 ‘우상 신’이며, 국제법 상으로는 ‘계속범’으로서의 반인도 범죄가족(집단)에 해당한다. 반면, 이승만은 우주만큼 소중한 개인의 존엄함을 가진 ‘보통’의 사람이 스스로 진리를 추구할 수 있도록 기회의 터를 제공했다. 그는 후대에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신약성경, 갈라디아서 5장 1절)”는 성경의 구절을 유언으로 남기고 갔다. 비록 그리스도를 마음에 품었을지라도, 종교 지도자가 아닌 국가 지도자로서 이승만이 우리에게 남긴 유업은 바로 “리버티”로써의 자유다.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라는 부분이 이승만이 주장하는 시민의 책임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자발적인 피, 땀, 눈물을 통해 스스로 굳건하게 설 때 우리는 주어진 자유를 지킬수 있다.


이 정신의 전쟁에서 이승만의 세계관을 선택하는 것은 자신이 믿고 따를 진리를 탐구하고 선택하는 과정과 결코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그렇기에 한 사람이 우주와 같이 존엄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자신이 선택한 진실 또는 진리를 진지하게 추구하기 위해 이 땅에서 '파괴자 김일성'이 아닌 '건설자 이승만'을 선택하는 사람은 과연 용기있는 개인인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은 미룰 수 없는 선택의 시간이 누구에게나 한 번은 찾아 올 것이다. 그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면 다음을 미리 기억해 두어야 한다. 이승만과 김일성이 대표하는 세계관의 충돌은 자유인과 종을 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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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전세계적 공산주의 광풍 속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주창한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박사.


7. ‘책임 있는 자유’의 길에서


만약 ‘책임 있는 자유’의 도상에서 앞서 언급한 역사의 마법사들과 또 다른 이들이 우리 앞에 나타나 계급과 불평등을 얘기한다거나,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또는 문화 막시즘(cultural marxism) 등의 새 옷으로 갈아입고 나타나 혐오금지와 차별금지를 목놓아 부르짖는 것을 본다면, 합리적 개인은 그저 묵묵히 ‘책임 있는 자유’의 길을 걸어 가야한다. 자신의 인생과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기회라는 관점에서 충분히 공평하다. 


물론 전선에서 땀 흘리고 손에 흙을 묻혀가며 외치는 자가 되었든, 묵묵히 맡은 인생을 성실히 살아가는 침묵의 다수(silent majority)가 되었든 모양은 다를 수 있다. 다만 언제 마칠지 모를 이 역사투쟁, 문화 혹은 세계관의 전쟁에서 “인간이 누리는 자유에는 한도가 있기에 책임 있는 자유가 진정으로 우리를 자유케 할 것”이라는 생각은 우리 모두에게 반드시 필요하다. 


8. 기업 무를 자가 이룰 새 일


신이 허락하신 참된 자유에는 본래 먼저 자유된 자가 아직 갇혀있는 자를 자유케하라는 뜻이 담겨있다. 그러한 점에서 인류사적 사명인 '북한주민의 해방'을 이루기 위해 자원하는 마음을 가진 '기업 무를 (작은)자들'(kinsman redeemer)이 곳곳에서 준비되고 있다. 그렇게 대한민국을 재건할 이들은 틀림없이 이승만의 후예일 것이다. 결국, 지금도 살아계신 역사의 주관자, 오직 유일하신 기업 무를 자(Jesus Christ, The Ultimate Kinsman Redeemer)가 이 일을 이루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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