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급공무원, 장관, 재벌 그리고 행복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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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퇴직한 친구들 몇 명과 모임이 있었다. 그 중 한 친구가 불쑥 이런 말을 했다. 비록 1급 공무원 밖에 못 했지만 말이야.”
기가 꺾여 있는 그의 옆에는 장관 출신 친구가 앉아 있었다. 1급이면 모두 부러워하는 고위직 공무원이었다. 그러나 그는 장관을 한 친구를 의식하고 불행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장관을 했던 친구는 이런 말을 했다.
“장관 넉 달 만에 쫓겨났어. 엊그제는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그때 데리고 있던 부하를 만났어. 나보고 의아한 얼굴로 장관님도 지하철을 타십니까? 하고 묻더라구. 장관 괜히 했어. 그것 때문에 사는데 오히려 부담이 돼.”
장군을 지낸 친구는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장군을 했는지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 해. 아스라한 옛날에 병정놀이를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장군으로 그가 예편을 하고도 많은 세월이 흘렀다.
한 재벌그룹의 노 회장과 얘기를 나누는 기회가 있었다. 그는 일제 강점기 조선 최고부자의 아들이었다. 해방 후에도 삼성에게 자리를 빼앗기기 전에는 대한민국 재계서열 1위를 자랑했었다. 그는 내가 재벌회장님이라고 하자 정색을 하며, “재벌은 무슨?
구멍가게 수준이지”하고 일축했다.
재계서열에서 밀린 불편한 심기가 표정에 그대로 나타났다.
며칠 전 잠실역 구내 승강장에서 국회의원을 하던 분을 만났다.
그는 구로동 공장지대에서 법률사무소를 했었다. 노동자들과 상담하면서 국회로 가는 게 그의 목표였다. 그리고 그는 국회의원이 됐다.
“요즈음도 계속 정치를 하십니까?”
한번 그 길에 발을 들여놓으면 빼기 힘들다고 했다.
“아니요, 안 해요. 그건 젊은 날 낮잠 자다가 꾸었던 꿈같이 희미해요.”
지위가 높거나 재벌인 사람들의 대다수는 행복해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 마음들이 공허해 보였다.
의외로 행복한 사람들은 다른 곳에 있었다. 임대 아파트에서 폐암으로 혼자서 죽어가던 강태기 시인의 말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창문을 열면, 아침 햇빛을 받은 이슬 맺힌 호박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요. 누가 호박꽃을 밉다고 했을까요?
세상이 너무 아름다워요. 동네 초등학교에서 남은 밥도 가져다주고 성당에서 반찬도 가져다 줘요. 일주일에 한 번씩 봉사하는 분이 와서 목욕도 시켜줘요. 감사하고 또 감사한 세상입니다.”
그 시인은 자동차 수리공을 하던 소년 시절 두 일간신문사의 신춘문예에 당선된 문학적 천재였다. 그러나 가난과 고독 그리고 병이 그의 삶이었다.
‘귀천’이란 시로 유명한 천상병 시인은 이 세상 소풍 왔다 잘 놀고 간다고 시에서 썼다. 명문대를 나오고도 가난하고 고독하고 아픈 그의 삶이었다.
변호사인 나는 감옥에서 행복을 발견할 때도 있다.
소년 시절부터 20년이 넘게 억울한 징역을 산 사람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비가 촉촉하게 오는 날이면 높은 회색 콘크리트 담 밑에 나있는 잡초를 보면서 걷고 싶어요. 바로 그게 눈앞에 보이는데도 걸을 수 없는 게 감옥살이예요.”
그가 몇 년 후 석방이 됐었다.
나는 그가 소원이라고 하던 보골보골 끓는 된장찌개를 뒷골목 식당에서 사주면서 그의 얘기를 들었다.
“밤에 뒷골목을 산책하면서 정말 행복했어요. 쓰레기가 널려있고 신문지가 휘날려도 나는 좋았어요. 자유롭게 걸을 수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말이죠. 길거리에서 부부싸움을 하는 걸 봤어요. 속으로 당신들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했죠. 감옥 독방에서 벽을 바라보고 있어 보세요. 싸울 사람이라도 있는 게 얼마나 행복인지.”
행복할 것 같은 사람들은 불행했다.
그들의 시선이 위만 보고 가지고 있는 걸 망각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시선이 아래를 향한 사람, 그리고 내면에 있는 영혼의 산에 오르려는 사람들은 진정한 행복과 평화가 있었다.
이 세상에는 소풍 온 사람도 있고, 욕망의 진흙탕에 빠져 허겁지겁 살다가는 존재도 있는 것 같다.
(출처: 변호사 엄상익의 글)
늘 행복한 일만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