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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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장의 말미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있다. 그리고 이 장면에 나다나엘이 등장한다.
나다나엘. 다른 여러 제자와 달리,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나다나엘에 대한 기록이나 언급이 많지는 않다. 특히나 나다나엘이 중심이 된 일화는 이 장면이 거의 유일하다. 나다나엘은 아주 인상적인 발언을 하는 것으로 그에 대한 짧은 기록이 시작된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빌립에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대답하며.
나사렛에선 선한 것이 날 수 없을까? 아마도 나다나엘이 맞을거다.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고 따르며 여호와께 성별하는 길을 버리고, 이방의 풍습을 받아들여 이방과 하나가 된 사마리아 땅... 그 사마리아의 나사렛이란 작은 동네는... '선한 것'이 나기 어려운 토양이 맞을거다. 그런 나다나엘의 판단과 분별은 틀리지 않는다고 해도 무방할 거 같다.
하지만 그는 자기 생각과 분별, 판단에만 매몰되지는 않았다. 빌립의 권고를 듣고, 나다나엘은 예수님께로 나아간다. 이 부분이 마음을 때린다. 아마도 틀리지 않을 내 생각과 분별, 그리고 판단을 잠시 내려두는 것. 그리고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것...
아마도 맞을 그런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잠시 내려두고, 예수님 앞에 나아간 자리에서 그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는 놀라운 평가를 예수님께 듣는다. 나다나엘은 얼마나 황당했을까? 생면부지의 누군가가 갑자기 자신에게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말하니... 이에 나다나엘은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라고 대답한다.
이런 나다나엘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라고... 여기에 어떤 간극이 있는 것 같다. 예수님과 나다나엘 사이에만 알 수 있는 그런 어떤 것. 도대체 예수님께서는 언제 나다나엘을 보러 다녀오신 걸까?
그에 앞서 나다나엘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두 가지,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는 말씀과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라는 말씀만을 듣고 예수님께서 '참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과 이스라엘의 왕이신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단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 약간의 간극이 느껴지는 이 과정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때때로 황무함을 느끼며 마음이 서글플 때가 있다.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어떤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나의 마음에는 '참 그리스도인이며, 참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자 하는 원함이 있지만, 내 안의 거짓과 위선에 가로막혀 원하는 바에 닿지 못한다. 원함은 나에게 있으나 그 길을 내가 이룰 수 없는 마음의 답답함과 괴로움. 곧 무엇으로도 그 갈급함을 채우지 못하는, 마음과 영혼의 곤고함이다.
나다나엘은 혹시 그런 곤고함으로 발버둥 치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마음에 참 이스라엘 사람이기를 바라고 원함은 있지만, 자기 자신의 거짓과 위선에 괴로워하며 때때로 눈물을 짓곤 했던 게 아닐까? 어느 날,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하나님께 마음으로, 영으로, 눈물로 그러한 괴로움을 호소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나다나엘이 하나님께만 쏟았던 마음과 괴로움, 눈물을, 근본 본체 되신 예수님께서 보아주셨던 것은 아니었을까?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사람은 누구나 거짓되고 위선적인 부분이 있다. 문제는 이 거짓된 위선의 수렁에서, 나는 스스로 나 자신을 구제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렇게 간사한 나를... 간사하지 않다고 해주실 수 있는 한 분이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그건 아픈 마음과 눈물로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주님께 나아가는 데에 여러 가지 장벽이 있을 수 있다. 아마 가장 큰 장벽 중 대표적인 것은 '내 생각과 판단'일 거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있으려고...'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사렛이라는 한계에 매몰되지 않으셨다. 베들레헴에서 나셨으나, 나사렛의 예수라는 것을 애써 부인하시거나 베들레헴의 예수라 정정하지도 않으셨다.
누구라도 '어쩔 수 없다'고 인정할만한 한계. 그런 나사렛이라는 한계를 뛰어넘는 능력과 권세가 예수의 이름에 있기에, 제자들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기도, 세례를 베풀기도, 기적과 표적을 행하기도 했다.
나 자신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그런 영혼의 곤고함을 주님께 호소하며, 나의 생각과 판단은 잠시 내려두고, 우리 주님께로 나아가자.
주님.
주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왕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