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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10월 유신 기념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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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TruthFor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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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유신, 박정희 대통령의 가장 큰 과오인가 업적인가?



유신은 국가적 비상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헌법을 정지하고 국회를 해산하여 강력한 대통령제를 구축한 국가적 결단이었다. 하지만 유신을 선포하게 된 시대적 배경과 맥락, 그 목적과 위대한 성취는 가려져 있다. 그리고 민주화가 과거 모든 사건을 재단하는 도그마로 통용되면서 유신이 박정희 대통령의 가장 큰 과오인 양 매도되고 있다. 안타깝게도 유신을 통해 이룩한 놀라운 경제성장의 혜택을 만끽하고 있는 후배 세대가 유신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유신은 당시 국민 절대다수의 압도적인 지지를 통해 진행된 국가적 결단이었다. 

유신이 대한민국 근현대사에 갖는 의의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당시 거세게 몰려왔던 북한의 도발과 닉슨 독트린으로 야기된 안보적 위기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아울러 71년 대선 당시 김대중 후보가 제시한 대중경제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유신에 대한 평가는 개인마다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유신 당시의 국내외적 위기상황에 대한 설명 없이 민주화를 절대적인 기준 삼아 유신을 재단한다면 이는 역사의 기만이고 후대를 우민화하는 것이다.


1. 유신은 북한의 도발로 국가존립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진행한 결단이었다. 

유신을 전후로 한 시기에 북한은 사실상 제2의 남침전쟁을 통해 한국을 무력으로 전복하려했다. 당시 한반도의 위태로운 안보 상황은 중국과 미국의 사료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2013년 10월 24일, 청샤오허(成曉河) 중국 인민대 교수는 평화문제연구소 창립 30주년 기념식에서 중국의 기밀해제 문서를 공개하면서 김일성이 1965년에 제2차 한국전쟁을 계획했음을 밝혔다.1) 1965년, 김일성은 한국이 베트남에 전투부대를 파병하면서 생긴 국내적 안보 공백의 틈을 이용해 남한을 침공하려 했고 북한 주재 중국 대사에게 파병을 요청했다. 월남 패망이 예견되던 75년 4월엔 중공을 공식 방문해서 모택동에게 남한 해방 전쟁을 위한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미국 외교사료집에 공개된 67년 7월 정보분석 자료는 북한이 한국에 대한 체제전복 전쟁을 벌이기 위한 대대적인 노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2) 67년 12월, 주한 미군 본스틸 사령관이 맥나마라 국방장관에게 발송한 보고에 따르면 ’김일성이 체 게바라가 제안한 노선을 따라 분쟁을 급격히 증가시키는 방책을 택했다는 확정적 첩보가 있다’고 밝혔다.3) 1960년대, 소련은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을 적극 지원하며 세계 각지에서 진행된 좌파 게릴라전을 지원했다. 6,70년대에 발생한 북한의 무수한 게릴라성 도발은 이런 연장선상에서 진행된 것이다. 북한의 도발은 후술하는 닉슨 독트린 선언 이후에도, 7·4남북공동성명 이후에도 계속됐다.


2. 닉슨 독트린은 한국을 비롯한 미국의 아시아 동맹국에 심각한 안보적 위기를 초래했다.

북한의 거센 도발이 계속되는 와중에 베트남 전에 지친 미국은 닉슨 독트린을 선언했다. 아시아의 방어는 기본적으로 아시아 국가들이 스스로 담당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동맹국들은 미국에 의존한 안보정책에 근본적인 변화가 불가피해 지는 심각한 위기상황에 직면한다. 미국은 베트남 철군을 시작했고 한국에서도 모든 주한미군을 철수할 계획을 발표했다. 실제로 71년 3월, 휴전선 방위를 담당하던 주한미군 2만 2천명이 철수했다. 같은 해 10월, 미국은 유엔총회에서 대만을 축출하고 중공의 가입을 허용했다. 월남은 미국과 맺은 상호방위조약에도 불구하고 75년에 결국 망했다. 유신을 단행한 72년 10월은 무리하게 진행되던 평화협상으로 인해 월남의 패망이 이미 예견되던 때였다.

유신을 전후로 한 시기, 사회주의 국가들 내부에서는 처참한 학살이 자행됐다. 당시 중국에서는 자본주의의 잔재를 청산한다는 명목으로 진행된 문화대혁명으로 수천만이 학살당했다, 캄보디아에서는 미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한 이후 친미 성향의 론 놀 정권이 무너지고 폴 포츠가 집권했다. 그는 농업에 기반을 둔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건설하겠다면서 킬링필드로 캄보디아 인구의 1/4을 학살했다. 이것이 유신 전후의 국제정세다. 닉슨 독트린은 미국과 동맹인 아시아 국가들 즉, 자유베트남과 자유캄보디아, 자유중국과 자유대한의 철저한 희생을 전제한 전략이었다.

유신 당시 대다수 국민들은 위태롭고 급박하게 전개되는 국내외 상황을 인식하고 공감했다. 75년 2월 12일, 박대통령이 대통령 직을 걸고 진행한 제4차 국민투표에서 투표율 79.8%, 찬성율 73.1%의 지지를 받은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다. 당시 대한민국 국민들은 미군 철수 이후 내부 분열로 월남이 망하는 것을 직접 봤고, 미군 일부가 철수한 한국에서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가슴 졸이며 바랬다. 두 달 쯤 뒤에 발생한 월남의 패망은 대한민국 국민들을 더욱 각성하게 했고, 반유신 세력은 동력을 잃었다. 유신이라는 결단이 빛을 발한 것이다.


3. 유신이 없었다면, 단언컨대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은 없었다. 

지금 대한민국 경제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철강, 화학, 조선, 전자, 기계, 비철, 자동차 산업 등은 모두 유신 이후에야 기틀을 잡았다. 포항종합제철소가 준공된 것은 유신을 단행한 이후인 1973년 7월 3일이다. 농촌을 근본적으로 개혁한 새마을 운동도 유신 이후에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만약 71년 대선에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고 유신이 없었다면 중화학 공업에 기반한 한강의 기적을 만든 대한민국은 없다. 이는 71년 대선 당시 김대중 후보가 주장한 대중경제론을 살펴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레닌이 제시한 제국주의 종속이론에 바탕을 둔 대중경제론을 표방했다. 대중경제론이 내세운 내포적 공업화는 박정희 정권이 1,2차 5개년 경제발전계획을 통해 다져온 경제발전의 기반을 허무는 것이었다. 수출입국과 중화학공업 육성을 부정하는 듯한 대중경제론은 지금 보면 결코 수긍할 수 없는 이론이다. 대한민국의 발전을 되돌려 버릴 수도 있었던 위험한 사고였다. 하지만 71년 대선 당시엔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고 박정희 대통령의 3선은 불안정한 승리로 이뤄졌다. 이런 분위기가 계속된다면 75년 대선에서는 정권이 교체될 수 있었고, 이는 곧 이제 막 태동하던 한강의 기적을 지우는 것이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혼돈과 위기에 빠지고 경제발전의 기초가 무너질 위기에 직면했을 때, 박정희는 유신을 통해 ‘중단 없는 전진’을 선택했다.

민주화는 국가가 존립해야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산업화 없는 민주화는 허상이다. ‘民’이 나라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나라가 존재해야 하고, ‘民’의 경제적 기반과 경제적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유신은 자유대한의 존립을 가능케 한 결단이었다. 가난을 추방하고 한강의 기적을 낳았다. 박정희가 추진한 정부주도 경제개발은 사회주의 계획경제와는 달리 ‘民’의 경제적 기반과 자유를 확장했다. 그런 점에서 대한민국의 실질적 민주화는 역설적으로 형식적 민주주의를 파괴한 유신을 통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를 이해하는 것이 보다 성숙하고 건강한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길이다.

한강의 기적은 유신을 통해 가능했다. 유신이 없었다면 한강의 기적은 없다. 대한민국이 없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2022.10.17
10월 유신을 기념하며

서울대 트루스포럼


1) 「중앙일보」, “[단독] 1965년 北 김일성 '제2 한국전쟁' 준비… 中에 파병 요청했었다”, 2013.10.24.


2) 123. Memorandum from Alfred Jenkins of the National Security Council Staff to the President’s Special Assistance(Rostow), Washington, July 26, 1967.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64–1968, VOLUME XXIX, PART 1, KOREA,


3) 138. Memorandum From the Director of Defense Research and Engineering (Foster) to Secretary of Defense McNamara. Washington, December 7, 1967.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64–1968, VOLUME XXIX, PART 1,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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