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과 1956년 선거와 1960년 선거는 국가 전략적인 측면에서도 질적으로 확연히 달라지는 지점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전 선거가 한국전쟁 이후 반공을 중심으로 한 체제 안정, 그리고 강력한 리더십으로 국가의 안보에 주력했던 시기였다면, 1960년은 일본과의 관계 설정이 중요한 이슈로 부각되던 시기였습니다.
85세 노익장을 발휘해서 애초에 원하지 않았던 4선 연임에 그가 도전했던 배경에는 새롭게 부상하고는 '한일국교 정상화'에 그의 마지막 미션을 완수하려는 의지가 발동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는 국제정치 무대에서 '외교의 달인'으로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일본 정부가 북송을 추진하는 과정 역시 동북아시아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회복하려는 의도들과 맞물립니다. 우리 국민과 민족의 이익을 무엇보다 우선시 하는 이승만 대통령 입장에서는 결코 물러설 수 없는 마지막 한 판 승부가 다가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동북아에서 반공 블럭의 강화를 통해 지역 안정을 원하던 미국, 1958년 북한 주둔 중공 인민군 30만 명의 귀환으로 발생한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고 남한과의 이데올로기 경쟁에서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려는 김일성의 의도, 북송 재일교포들의 자산 처분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취하려는 조총련, 그리고 60만 명의 재일교포들을 어떤 방식으로든 해외로 추방하고자 했던 요시다와 기시로 이어지는 일본 정부의 책략, 이런 모든 것들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북송'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니가타에서 청진으로 첫 번째 북송선으로 운항했던 배가 소련 국적의 선박이었던 것 역시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을 제외한 중국, 소련, 미국, 일본, 북한까지 그들에게는 각자 그들만의 이익과 이유가 있었습니다. 결국 그들과 홀로 외롭게 끝까지 싸웠던 사람이 바로 이승만 대통령이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정리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가장 중립적이어야 했던 국제적십자가 가장 정치적인 이슈에 동원된 것 역시 '북송'의 모순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중립과 인권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고 활동하는 국제적십자 스위스 제네바 본부 입장에서는 감추고 싶은 역사가 쓰여진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안타깝게도 강대국들의 이런 이해와 요구 속에서 10만 명에 가까운 재일교포들의 삶이 기만당하고 유린당했습니다. 양심과 정의, 진실에 호소해서 언젠가 반드시 그 실체가 규명되어야 하는 우리 역사의 어두운 한 부분일 것입니다. 저는 미약한 힘이라도 끝까지 그들 편에 서서 보태려고 합니다. |